작은회사 PT 지옥도3
퇴사는 결심보다 문장이었다.
“저 퇴사합니다.”
말로 하면 흔들린다.
사람은 말로 타협하고, 말로 미뤄버린다.
그래서 나는 문서로 했다.
이 회사에서 문서는 늘 사람보다 오래 남으니까.
나는 이른 아침, 출근 시간보다 20분 먼저 회사에 들어왔다.
회사 문을 열자마자 느껴졌다.
아무도 없는데도, 이미 누군가가 내 등을 누르고 있는 느낌.
내 자리로 가서 노트북을 켰다.
그리고 파일을 열었다.
퇴사_계획_진짜최종_v1(나만아는).txt
제목부터 이미 웃겼다.
퇴사일: 00월 00일
인수인계: 00월 00일까
잔여 연차: 00일
업무 범위: 인수인계 문서에 한정
마지막 줄을 쓰는 데 오래 걸렸다.
“추가 업무 요청은 인수인계 범위를 초과하므로 진행이 어렵습니다.”
나는 그 문장을 쓰고, 잠깐 멈췄다.
내가 이런 문장을 쓸 수 있는 사람이었나 싶어서.
대표에게 메시지가 왔다.
“팀장님, 오늘 10시에 잠깐 회의실에서 봐요, 분위기 좋게!”
분위기.
그 단어가 오면, 나는 자동으로 한 걸음 물러났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제가 터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날은 다르게 했다.
나는 답장 대신, 퇴사서를 출력했다.
프린터가 종이를 뱉어내는 소리가 났다.
이상하게도 그 소리는 “탈출”처럼 들렸다.
10시.
회의실엔 대표, 이사, 그리고 제작팀장이 있었다.
제작팀장은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 표정은 여전히 “기획이 이상하니까 대충해요”의 표정이었다.
대표가 웃었다.
“팀장님, 요즘 표정이 좀 어두우세요. 회사 잘되면 다 해결—”
“대표님.”
나는 대표의 말을 끊었다.
끊었다는 게 중요했다.
이 회사에서 대표 말은 보통 끝까지 흘러서 내 업무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종이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퇴직원 입니다.”
대표의 얼굴이 잠깐 멈췄다.
‘잠깐’이지만, 그 잠깐이 너무 좋았다.
내가 만든 정적이었다.
이사가 먼저 웃었다.
“팀장님, 지금 분위기 좋은데 왜 그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분위기 좋을 때 퇴사하는 게 제일 깔끔하잖아요.”
대표가 당황한 웃음을 꺼냈다.
“아니… 팀장님, 이건 좀… 너무 갑작—”
“갑작스럽지 않아요.”
나는 너무 차분해서, 내 목소리가 낯설었다.
“저는 6개월 동안 계속 말했어요. 문제도, 기준도, 리스크도요.”
이사가 끼어들었다.
“지금 중요한 건 수주잖아. 이 타이밍에—”
“맞아요.”
나는 웃었다.
“그래서 수주 타이밍엔 늘 못 나가죠.
수주 전엔 ‘지금 수주 해야 한다’고 못 나가고,
수주 후엔 ‘지금 운영해야 한다’고 못 나가고.”
대표가 급히 말했다.
“팀장님, 회사 잘되면—”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속에서 무언가가 풀렸다.
풀려서 더 단단해졌다.
“대표님.”
나는 천천히 말했다.
“회사 잘되면 해결되는 게 아니라, 제가 버티면 안 드러나는 거예요.”
대표가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사는 눈을 찌푸렸다.
제작팀장은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 표정이 있었다.
‘아, 이거 진짜구나’ 하는 표정.
대표는 결국 제일 대표다운 말을 했다.
“그럼… 팀장님이 원하는 조건이 뭐예요?
연봉? 성과금? 업무 조정?”
나는 그 질문이 조금 슬펐다.
마치 내가 그동안 원했던 게 “돈”이었던 것처럼 들려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조건이 아니라, 구조 문제예요.”
이사가 피식 웃었다.
“구조가 하루아침에 바뀌냐?”
나는 아주 솔직하게 말했다.
“안 바뀌죠. 그래서 나갑니다.”
그 순간, 회의실 공기가 바뀌었다.
이 회사에서 ‘나간다’는 말은 협박이 아니라—
시스템 점검이었다.
대표가 급하게 방향을 틀었다.
“그럼 인수인계는… 최소 한 달은—”
“2주.”
내가 말하자 대표가 눈을 크게 떴다.
“2주요?”
“네. 제가 지금까지 회사 전체를 감당했으니까,
2주면 충분할 거예요.”
대표는 반사적으로 말했다.
“그건… 너무 어렵지 않을까요?”
나는 웃었다.
“그럼 제가 그동안 해온 게 얼마나 어려웠는지,
이제 회사가 알게 되겠네요.”
회의는 결론을 냈다. 정확히는, 결론을 “받아들였다.”
대표는 끝내 마지막까지 중재자처럼 말했다.
“팀장님… 그래도 좋은 분위기로 마무리합시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서 문서로 남겼습니다.”
이사가 나를 보고 말했다.
“팀장님, 나가면 후회할 수도 있어요.”
나는 대답했다.
“후회는 이미 충분히 했고요.
이제는… 회복을 하려구요.”
제작팀장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그럼 저희는 이제 어떻게 해요?”
나는 잠깐 그를 봤다.
한 번도 제대로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얼굴.
그리고 아주 짧게 말했다.
“이제는 스스로 하셔야죠.”
그 말이 내 복수였다.
큰소리도 욕도 아닌,
그냥… 책임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말.
퇴사서를 낸 날 오후, 회사 단톡방에 공지가 올라왔다.
“팀장님 퇴사 관련하여, 업무 공백 최소화를 위해 모두 협조 부탁드립니다.”
나는 그 문장을 읽고 웃었다.
‘협조 부탁’은 늘 나에게만 협조하라는 말이었는데,
이번엔 전 직원에게 날아갔다.
그리고 그게 너무 통쾌했다.
내 자리에는 바로 “대체 계획”이 올라왔다.
외주, 프리랜서, AI 툴, 임시 TF.
나는 더 웃었다.
회사에 사람은 없으면서, ‘대체’는 항상 빠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대체할 수 있는 건 산출물이지,
내가 떠안았던 구조의 모순은 아니다.
그건 대체가 아니라, 전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트북을 닫고,마지막으로 사무실을 한 번 봤다.
희한하게도 공기가 가벼웠다.
내가 나가서가 아니라, 내가 더 이상 공기를 떠받치지 않아서.
문을 열고 나가면서, 나는 속으로 말했다.
“회사 잘되면 해결되는 게 아니라…
내가 여기서 빠지면 드러나는 거다.”
밖은 춥고, 돈도 없고, 불안도 그대로였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나는 다시 사람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