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회사의 PT 지옥도4
퇴사 다음 날,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기까지 두 시간이 걸렸다.
몸이 아픈 건 아니었다.
몸이… 이제서야 내 것이 되는 중이었다.
휴대폰은 뒤집어 뒀는데도 진동이 새어 나왔다.
대행사에서 배운 유일한 평화는
알림을 끄는 게 아니라 알림을 모른 척하는 능력이었다.
나는 결국 휴대폰을 뒤집었다.
단톡방이 불타고 있었다.
제작팀장: “이거 누가 컨펌해요?”
운영: “클라가 방금 전화했어요”
미디어: “예산 변경 요청 들어왔는데요”
대표: “다들 침착하게~ 분위기!”
그리고 그 사이, 팀원한테서 개인톡이 왔다.
팀원: “팀장님… 대표님이 저 회의 들어오래요…”
나는 그 문장을 읽고,
잠깐 멈췄다.
내가 회의실에서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팀장님, 잠깐만요.”
잠깐은 늘 한 달이 되었다.
“회의”라고 적혀 있었지만, 사실은 등기였다.
업무를 누구 이름으로 옮겨 적을지 결정하는 자리.
팀원이 나중에 통화로 들려준 회의실은, 내가 너무 익숙하게 아는 풍경이었다.
대표는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늘 다정했는데,
이상하게도 끝에는 못 박는 힘이 있었다.
“OO씨, 그동안 팀장님 옆에서 배웠잖아.”
팀원이 “네…”라고 하자, 대표는 바로 다음 문장으로 넘어갔다.
“그럼 이제부터는 OO씨가 다 하면 돼.”
다 하면 돼.
그 말은 간단해서 더 잔인했다.
대행사에서 ‘다’는 업무의 총량이 아니라 책임의 방향이었다.
팀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고 했다.
“저… 아직 제가 팀장님만큼은…”
대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더 좋은 기회지. 사람은 책임을 먹고 크는 거야.”
나는 그 문장을 들으며 웃을 뻔했다.
그건 성장이 아니라 소화불량이에요.
“OO씨가 퇴사한다고 해도, 최소 두 달은 있어줘야 해.”
두 달.
그건 계약서도 아니고, 법도 아니고, 규정도 아니었다.
그냥 대표가 말하는 회사 달력이었다.
배웠으니 네가 다 해라.
그 문장은 교육이 아니었다.
인수인계라는 이름의 전가였다.
그리고 두 달은 규정이 아니었다.
겁을 유지하기 위한 기간이었다.
팀원이 회의실에서 나와서 내게 전화했을 때,
나는 이상하게도 분노가 아니라 예감이 먼저 왔다.
그날 오후, 팀원은 다시 회의실에 들어갔다.
대표가 그 애를 보며 말했다고 했다.
“OO씨,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마요.
그냥… 잠깐만 맡아줘.”
이사는 바로 옆에서 노트북을 두드리며 덧붙였다.
“업무 분배는 합리적으로 하자.
OO씨가 일단 중심 잡고, 각 부서가 따라오면 되지.”
중심을 잡는다.
회사 전체를 감당하라는 말이었다.
정중하게, 아주 합리적인 말투로.
팀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고 했다.
“제가… 어떤 업무까지요?”
대표가 환하게 웃었다.
“그냥 팀장님 하시던 거.”
그 말은 주문처럼 가벼웠다.
“팀장님… 지금 회사에서… 싸움 났어요.”
싸움.
드디어.
회의실 문이 닫혔고,
그 안에는 늘 같은 세 사람이 있었다.
대표.
이사.
제작팀장.
그 셋은 그동안 서로 같은 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나를 한가운데 두고 같은 편인 척하던 사람들이었다.
대표는 “중재자”였고,
이사는 “현실주의자”였고,
제작팀장은 “감도 담당자”였다.
셋의 공통점은 하나였다.
문제가 생기면
셋 다 같은 방향을 봤다.
나.
그런데 내가 없으니까,
셋은 처음으로 서로를 봤다.
대표가 먼저 말했다고 했다.
“자, 오늘은 잘 넘어가야 해. 클라 임원 들어온대. 분위기…”
이사가 바로 끊었다.
“분위기 말고, 리스크. 어제 피드백 기억하지? ‘시안 아쉽다’.”
제작팀장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젖혔다.
“근데 그거… 어제도 말했잖아요. 기획 가이드가 좀…”
이사가 제작팀장을 쳐다봤다.
“지금도 기획 얘기해? 기획은 나갔어.”
제작팀장은 잠깐 멈칫했다.
그리고 너무 자연스럽게 말했다.
“그러니까요. 나갔으니까 더 문제죠.”
그 말이 회의실 공기를 바꿨다.
대표는 웃음을 켜며 말을 휘감았다.
“아니 뭐… 나갔다고 끝난 건 아니고…우리가 잘 정리하면…”
‘정리’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이사가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정리하려면 돈 써야 돼. 외주든 뭐든.”
대표의 웃음이 조금 얇아졌다.
“외주? 지금? 비용이…”
제작팀장이 바로 반응했다.
“외주 쓰면 저희 팀은 뭐가 돼요?”
이사가 웃었다.
“그럼 네가 해. 오늘 안에.”
제작팀장이 말끝을 올렸다.
“제가요?제가 왜요? 저는 제작이고요, 기획도 아니고요.”
대표가 그 틈을 타서 말했다.
“그래, 그래. 그러니까 서로 이해하자.일단 오늘은 제안서를 써야하는데 일단 가지고 있는거에서 이부분을
좀 디벨롭해서 수정하면…”
제작팀장이 툭 던졌다.
“그럼 수정하면 되죠.”
이사가 천천히 말했다.
“누가?”
제작팀장이 말을 아꼈다.
그 말이 제일 정직했다.
‘내가 하긴 싫다’는 말.
대표는 그 순간부터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대표의 본능은 언제나 한 가지였다.
사람을 꽂는다.
대표가 회의실 밖을 향해 말했다.
“OO씨!”
팀원이 들어왔다.
아직 몸에 맞지 않는 정장을 입은 얼굴이었다.
대표는 웃으며 말했다.
“너 7개월 배웠잖아.
정리하고, 클라한테 대응하고, 수정 요청 오면 정리해서…”
문장이 길어졌다.
길어지는 문장은 책임이 흩어지는 문장이다.
이사가 딱 끊었다.
“결론.OO씨가 담당.”
팀원의 눈이 흔들렸다.
“제가요…?
제작팀장이 조용히 말했다.
“그러니까… 기획이 빠진 게 문제라니까요.”
이사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문제는 기획이 아니야.
문제는 대표가 기준을 안 세우고,
우리가 지금까지 팀장 하나로 버틴 거야.”
대표가 발끈했다.
“내가 기준을 안 세웠다고?”
제작팀장은 그 틈을 파고들었다.
“근데 대표님, 솔직히 말하면
외주 써야 해요. 저희 지금 못 해요.”
대표가 확 고개를 들었다.
“외주? 돈을 지금?”
제작팀장이 말했다.
“그럼 대표님이 하세요.”
대표는 웃음을 꺼내려다 실패했다.
이사가 그 말을 받았다.
“그래. 오늘은 누가 밤을 새.”
그 질문 하나로
회의실은 갑자기 본색을 드러냈다.
대표는 “분위기”를 꺼냈지만,
분위기는 야근을 막아주지 못한다.
제작팀장은 “감도”를 꺼냈지만,
감도는 해결을 만들어주지 못한다.
이사는 “현실”을 꺼냈지만,
현실은 사람을 더 붙여주지 못한다.
그리고 그 순간,
세 사람은 처음으로 서로를 향해 말했다.
“그럼 당신이 해.”
그게 싸움의 시작이었다.
팀원이 내게 전화로 말해줬다.
“팀장님… 지금 대표님이 이사님한테
‘왜 이렇게 공격적이냐’고 하고요…”
“응.”
“이사님은 대표님한테
‘이제 와서 분위기 타령하지 마’라고 하고요…”
“응.”
“제작팀장은 둘한테
‘기획이 없어서 망한다’고 해요…”
기획이 없어서 망하는 게 아니다.
기획이 모든 걸 대신해줬기 때문에
이 구조가 망할 타이밍을 늦춘 거다.
그리고 그 타이밍이 지금 온 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