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캐릭터만 여행하고 있지않은가?

by Way Maker

요즘은 내가 여행을 안 한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여행을 안 하고 게임 캐릭터만 여행한다.

가장 많이 걷는 건 ‘나’가 아니라 ‘저쪽’이다.

용과 같이의 주인공은 카무로쵸를 횡단하고, 소텐보리의 강가를 지나며,
이상하게도 늘 누군가를 구하고, 늘 누군가와 싸우고, 결국엔 뭔가를 해결한다.


나는 그걸 소파에 앉아서 본다.
하나는 피곤한데, 하나는 피곤할 틈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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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무로쵸의 네온은 늘 켜져 있다.
그 불빛은 “오늘은 여기서 뭐라도 일어나겠지”라는 느낌을 준다.
현실의 불빛은 좀 다르다.
현실의 불빛은 주로 ‘알림’이다.
결제 알림, 탈락 알림, “검토해보겠습니다” 알림.
네온과 알림의 차이는 사소해 보이지만, 사람을 완전히 다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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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텐보리의 강은 흘러간다.
그 강은 “그래도 시간은 가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나는 그 강을 보면서도 내 시간은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하루가 시작되는 게 아니라,
어제의 불안이 이어진다.
불안은 저장 기능이 있다. 자동저장. 강제저장.


파이널판타지의 세계는 넓다.
지도는 열면 끝이 없다.
마을이 있고, 사막이 있고, 바다가 있고,
어디로 가든 퀘스트가 있다.


퀘스트는 친절하다.
“이걸 하면 된다”고 말해준다.
현실은 그게 없다.
현실은 퀘스트가 아니라 판정이 먼저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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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세계가 비현실적인 이유는 용과 마법 때문이 아니라,
진행률이 보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게임은 로딩이 있어도 ‘이동 중’이다.
현실은 로딩이 있으면 ‘멈춘 것’처럼 느껴진다.
여기서부터는 미묘한 정신 싸움이다.
정말 멈춘 게 아닌데, 멈춘 것처럼 보이는 상태를 견디는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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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오늘도 컨트롤러를 잡는다.
캐릭터는 또 길을 나선다.
카무로쵸의 밤을 지나, 소텐보리의 강을 지나,
어딘가의 던전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가끔, 이상하게도
그 캐릭터를 움직이다 보면
내가 여행을 못 하는 이유가 선명해진다.


겁이 나서다.
여행이 아니라,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게.

게임은 실패해도 다시 로드하면 된다.
현실은 로드가 없다.
대신 현실에는 이상한 기능이 하나 있다.


버티기.

버티면 다음 장면이 열린다.

버티면 다시 시작이 가능해진다.
게임 캐릭터가 여행을 하고 있는 동안,
나는 현실의 로딩 화면을 지나고 있는 거다.


그래서 오늘의 결론은 조금 우습지만 꽤 진지하다.

나는 지금 여행을 못 하는 게 아니라, 로딩 중이다.
그리고 로딩이 끝나면, 나도 움직일 거다.

카무로쵸는 내일도 반짝일 것이고,
소텐보리의 강도 흘러갈 것이다.
파이널판타지의 세계도 넓을 것이다.


그때는 나도,
내 캐릭터 말고
내가 직접 걸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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