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행사에서 이 문장은 멋있는 리더십 구호가 아니라, 자주 ‘체계 부재’를 덮는 주문처럼 들린다.
어떤 날은 이끈다는 말이 “기준 없이 밀어붙이기”가 되고, 어떤 날은 따른다는 말이 “결정 없는 대기”가 되고, 어떤 날은 비키라는 말이 “책임을 아래로 넘기기”가 된다.
결국 남는 건 하나다. 기준이 없다.
그래서 프로젝트는 매번 운이 되고, 납기는 흔들리고, 수정은 감정 싸움이 되고, 마지막은 늘 ‘오늘 안에 가능해요?’로 폭발한다.
나는 이 업계의 문제가 ‘사람이 나빠서’ 생긴다고 믿고 싶지 않다.
대부분은 열심히 한다. 너무 열심히 해서 문제를 가린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대행사는 체계를 못 만든 게 아니라, 체계를 만들기 어려운 방식으로 오래 굴러왔다.
대행사의 체계 부재는 회의실에서 언어로 드러난다. 내가 자주 들었던 문장 세 개가 있다.
이 말은 빠른 출발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기준 회피다.
레퍼런스는 방향일 수는 있어도 합격선이 아니다. 레퍼런스를 들이밀면 누가 무엇을 왜 선택했는지 설명할 필요가 줄어든다. 기준이 ‘우리의 판단’이 아니라 ‘남의 결과물’로 대체되기 때문이다.
익명으로 말하자면, 어느 프로젝트에서 레퍼런스가 다섯 번 바뀐 적이 있다. 바뀐 건 레퍼런스가 아니라 심사 기준이었다. 팀은 결국 ‘기획’을 한 게 아니라, 레퍼런스 따라잡기를 했다.
일이 쌓인 게 아니라 피로만 쌓였다.
이 문장이 무서운 이유는, 실행 지시 같지만 실행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느낌’은 크리에이티브에 필요하다.
문제는 대행사에서 느낌이 측정 불가능한 판정 기준이 되어버린다는 점이다.
“좀 더 고급스럽게.”
“요즘 감성으로.”
“딱 보면 와야지.”
이런 말이 나오는 순간 수정은 끝이 없어지고, 팀은 결과물을 만드는 게 아니라 ‘기분’을 맞추기 시작한다.
기준이 없을수록 권력은 강해진다. 말 한마디로 뒤집을 수 있는 사람이 가장 강한 구조가 된다.
대행사의 일정은 늘 급하다.
그런데 정말 급한 건 ‘일’이 아니라 ‘결정’이다.
결정이 늦게 내려오면, 뒤에서는 시간이 폭발한다.
회의는 길고 승인 라인은 많고 “윗선 컨펌”은 계속 미뤄지는데, 마감은 그대로다. 그래서 마지막 24~48시간에 “오늘 안에 가능해요?”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 비용은 늘 그렇듯 아래에서—야근과 주말과 감정노동으로 결제된다.
이 세 문장이 반복되는 조직은 결국 이렇게 된다.
기준은 없고
책임은 흐리고
일정은 압박이고
수정은 감정 싸움이 된다
“그럼 기준을 만들면 되잖아.”
말로는 쉽다. 그런데 한국 대행사 구조에서 기준은 종종 돈과 권력과 문화에 동시에 걸려 있다.
대행사는 대부분 프로젝트 단위로 돈을 번다. 시작할 때만 돈이 생기고 끝나면 해산한다.
체계는 ‘다음에도 쓸 것’에 투자하는 건데, 다음 프로젝트는 늘 불확실하다. 그래서 체계는 늘 뒤로 밀린다. “이번 건만 넘기자”가 체계를 잡아먹는다.
기준이 문서로 남으면, 결정이 기록으로 남고, 기록이 남으면 책임이 추적 가능해진다.
그런데 많은 조직은 추적 가능한 책임을 싫어한다.
기준이 없으면 말이 권력이 되고, 위계가 기준이 된다. 그래서 수직 문화는 체계를 ‘인성 문제’로 포장하지만, 사실은 체계를 막는 구조적 선택이 된다.
대행사는 경험이 사람 머리에만 남는 경우가 많다.
사람이 바뀌면 노하우가 증발한다. 그래서 열 번 해도 열한 번째는 매번 새로 시작한다. 체계는 기록에서 자라는데, 기록이 없으니 체계도 없다.
이 업계는 너무 오래 “사람”으로 문제를 해결해왔다.
체계가 없어서 터진 일을, 사람의 체력으로 막았다.
기준이 없어서 생긴 혼란을, 실무자의 밤으로 덮었다.
그리고 그걸 ‘열정’이라고 불렀다.
이제는 그 언어를 바꿔야 한다.
“레퍼런스 비슷하게”가 아니라, 합격선이 무엇인지를 먼저 말해야 한다.
“느낌”이 아니라, 금지사항과 기준을 먼저 정해야 한다.
“오늘 안에”가 아니라, 결정이 늦어진 비용을 기록해야 한다.
이끌든가, 따르든가, 비키든가.
나는 이 문장을 다시 쓰고 싶다.
이끈다는 건 기준을 세우는 일이고,
따른다는 건 기준을 지키는 일이고,
비킨다는 건 책임을 아래로 떠넘기는 게 아니라—기준을 방해하는 방식을 버리는 일이라고.
대행사가 살아남는 방법은 “더 싸게”가 아니라 “덜 불안하게”다.
그리고 덜 불안해지려면, 결국 한 가지밖에 없다.
기준을 만들고, 기준을 기록하고, 기준을 지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