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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순범 Dec 22. 2022

<아마겟돈 타임>, 위태롭게 매달렸던 어린 시절

엔딩 크레디트마저 왼쪽에 두는 이유는.

제임스 그레이 감독의 영화 <아마겟돈 타임>의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며 여운을 곱씹을 무렵, 내 앞에 앉아 계시던 아주머니 두 분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에이, 영화가 이게 뭐야!"


"아니, 무슨 영화가 이래?"


헉!


근데 그럴만하다. 이 영화는 관객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영화 <아마겟돈 타임>은 명쾌하게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고, 속도감 있게 나아가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제임스 그레이 감독은 자신의 어린 시절에 카메라를 비추며 기억을 일일이 어루만진다. 누구나 한 번쯤은 겪었을 그 어린 시절, 모든 것이 아득하고 멀게 느껴지던 그 시절, 모든 세상이 나를 미워해서 위태롭게 매달렸던 그 시절. 하지만 미약하게나마 나아가는 미동을 영화는 현현하게 드러낸다.




'폴'은 그림을 열심히 그리며 예술가를 꿈꾸는 소년이다. 하지만 자신의 가족 아빠와 엄마, 형은 폴에게 엄격하다. 하지만 오직 할아버지만이 폴의 꿈을 이해하고 들어준다. 학교에서 친구 '죠니'와 함께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며 우정을 쌓아가지만 가족은 죠니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멀리하라고 한다. 또한 폴은 억지로 사립학교로 전학까지 가게 된다. 결국 폴과 죠지는 자신을 억압하는 뉴욕을 떠나 플로리다로 떠나는 계획을 세운다.


어린 시절이 최후의 전쟁같던 시간

영화 <아마겟돈 타임>에서 제목은 다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아마겟돈(Armagedon)'은 성경에서 나타난 최후의 전쟁을 의미한다. 즉 '아마겟돈 타임'은 어린 시절이 최후의 전쟁처럼 위태롭게 느껴졌던 시간의 의미일 수도 있다. 1979년 '더 클래시(The Clash)'가 리메이크한 노래 '아마겟돈 타임'에서 따온 것이기도 하다. 좀 더 미국의 역사를 통해 들여다보면 1980년대 영화에서 TV 속에 등장하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연설의 일부이기도 하다. 당시 미국 보수주의 상징이었던 레이건은 "우리 세대는 세상의 종말(Armageddon)을 목도할지도 모르겠다"라며 전쟁의 위협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영화의 제목은 1980년대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되살리는 동시에, 이로 인해 자신의 유년 시절을 지배하였던 시대정신을 드러내기도 한다.




당시 시대상을 생각한다면 폴이 사립학교에 입학해서 연설을 듣는 장면은 전형적인 미국의 엘리트주의를 꼬집는다. 사립학교 조례에 폴은 다른 학생들과 똑같은 교복을 입고 서있는다. 그때 폴은 같은 교복으로 개성을 박탈 당해 무색무취이기 때문에 다른 학생들과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메리앤 트럼프가 올라와 노력과 전투심을 강조하는 연설을 한다.(이때 깜짝 카메오가 등장한다.) 그리고 자신의 길과 성공을 잡을 것을 말한다. 그러나 메리앤 트럼프가 그 유명한 도널드 트럼프의 누나인 것을 생각하면 그녀의 연설은 다소 모순적이다. 그녀는 백인 상류층 엘리트이다. 즉 3루에서 태어났지만 자신이 3루타를 쳤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결국 사립학교는 당시 미국의 엘리트주의와 인종, 계층 차별의 기류가 존재하는 공간인 것이다. 그리고 "칼라가 목을 조른다"라는 대사처럼 폴을 압박한다.




영화 <아마겟돈 타임>은 선과 악을 나누어 이분법으로 캐릭터를 직조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양면성을 나타내며 마음을 풍부하게 드러낸다. 아버지 '어빙'은 "나의 꿈은 네가 나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 되는 거"라며 아들을 걱정하지만 두 아들들을 차별 대우한다. 어머니 '에스더'는 감성적이며 아들에게 따뜻하게 대하는 것처럼 보여도 학교 교육위원회 선거에 출마하는 것을 우선시하며 폴과 죠지를 멀리 두려고 한다. 심지어 폴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고 꿈을 응원했던 할아버지조차도 폴을 사립학교로 전학시킨다.


'폴'의 삶, 그리고 '그라프'의 삶.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이처럼 캐릭터의 다양한 면을 드러내는 직조법의 목적은 주인공 폴에게 계속 차별과 자신의 위치를 상기시키는 데 있다. 폴은 유대인으로서 차별의 피해자이면서 흑인 죠니에 비하면 사립학교에 다니는 상류층 백인이다. 또한 예술가라는 꿈을 탄압받지만 죠니의 우주과학자라는 꿈보다 현실성이 있는 위치이다. 결국 폴은 이 간극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아 가는 과정을 앓는다. 폴은 사립학교로 전학을 가면서 유대인 부모님으로부터 '그라프'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는다. '폴'의 삶은 예술가로써 창작하는 것이고, '그라프'의 삶은 사립 학교를 다니면서 미국 사회에서 차별의 위치를 가지는 것이다. 결국 양가적이고 모순적인 위치를 가진 폴은 무슨 선택을 할 것인지, 당신이라면 무슨 선택을 할 것인지 영화는 질문한다.




그런 점에서 폴에게 칸딘스키의 그림은 영감의 대상이면서 삶의 선택이다. 공교롭게도 칸딘스키는 러시아 미술가이며, 제임스 그레이 감독 또한 러시아계 유대인이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선택한 칸딘스키의 그림은 추상화로써 당시 미국에서 허용할 수 없는 창의성이다. 결국 '그라프'의 삶이 아닌 '폴'의 삶(칸딘스키의 삶)을 선택한다는 것은 미국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을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할아버지 '애런'은 폴이 사립학교 학생들이 죠니를 놀리는 상황에서 아무 말도 못 하자, 잘못된 것이 있다면 잘못됐다고 이야기해야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폴이 죠지와 함께 플로리다로 떠나는 계획에 실패하자 상상 속의 할아버지가 세상과 싸우는 것은 원래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계속 노력해야 하고 절대 져선 안된다고 조언한다.

폴과 할아버지가 로켓을 날리는 장면이 그토록 뭉클하게 다가오는 것도 폴이 로켓처럼 미국 사회에서 벗어나 자신의 꿈을 펼치기 바라는 마음과 희망이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엔딩 크레디트마저 왼쪽에 두는 이유는

그렇기 때문에 영화 <아마겟돈 타임>의 마지막 장면의 울림은 더욱 크게 다가온다. 사립학교에서 열린 명절 추수감사절 파티에 폴은 그 공간을 탈출한다. 교사가 말하는 "너희는 엘리트"라는 대사가 보이스 오버되는 마지막 장면에서 폴은 화면 왼쪽에 있는 길을 향해 나아간다. 오른쪽은 학교가 있는 공간이면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손이 있는 방향이다. 왼쪽은 다른 길로 나아가는 공간이면서 남들과 다른 방향을 선택하는 방향이다. 결국 폴은 할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왼쪽으로 나아가며 '폴'의 삶을 선택한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기에, 세상과 싸워야 하기에,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며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엔딩 크레디트마저 왼쪽에 두어 한 소년의 선택을 적극 지지한다.



배우들의 앙상블이 탁월한 영화다. '폴'역을 맡은 뱅크스 레페타와 친구 '죠니'를 맡은 제일린 웹도 인상적이지만, 아역배우들의 연기를 묵묵하게 뒷받침해 주는 안소니 홉킨스, 앤 해서웨이, 제레미 스트롱은 시종일관 안정적이다. 특히 앤 해서웨이는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 아닌 참고 억누르며 영화의 분위기를 이끌어간다. 단순히 연기를 테크니컬하게 하는 것을 넘어서 인물의 심리를 동일시한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연기다.



"예술가의 역할은 질문을 던지고 빛을 비추는 것이지 교훈을 주는 것이 아니다."


제임스 그레이 감독은 영화 <아마겟돈 타임>이 상영된 올해 75회 칸 영화제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 영화는, 더 나아가서 예술은 정답을 쥐여주는 것이 아니다.(그래서 아마 내 앞의 아주머니들은 영화에 실망하셨을 것이다.) 영화 예술은 우리가 모르고 지나간, 혹은 잊고 지나간 모든 것들을 이야기하고 빛을 비추며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위태로운 어린 시절을 따뜻한 시선으로 어루만지는 <아마겟돈 타임>이 우아하고 기품있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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