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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순범 Jan 31. 2023

<바빌론>, '리나 라몬트'를 향한 러브레터

아름답지 않더라도 나는 영화 그 자체를 사랑해

<위플래시>, <라라랜드>로 유명한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신작 <바빌론>을 보았습니다.



제작비 8000만 불인데 미국에서 흥행은 1530불, 글로벌 총 흥행은 현재 3000만 불로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작품 중 아마 가장 흥행 실패한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현재 로튼 토마토에서도 '썩은 토마토'를 받으며 비평 측면에서도 엇갈리고 있죠. 아마 대담하고 과감하며 적나라한 표현에 많은 비판이 오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영화 <바빌론>은 수위 높은 표현도 서슴지 않습니다. 영화는 1926년부터 1932년까지의 할리우드를 다루고 있는데, 초반부의 환락적인 파티 장면이 꽤 수위가 높습니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코끼리가 똥까지 뿌리며 영화는 마치 앞으로 대담하게 나아갈 것이라며 선포하는 듯합니다. 할리우드의 더럽고 어두운 면을 보여주기 위한 선택인데,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과하다고 느끼며 비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에 대한 비판이 틀리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만, 저는 이를 다르게 보고 싶습니다. 영화 <바빌론>에서 나타나는 환락적이고 적나라한 장면들은 대담한 미학적 승부수입니다. 그러니까 이 자극적인 장면들은 그저 즐기고 도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영화의 핵심과 맞닿아 있습니다. <바빌론>은 영화에 관한 영화이고 영화에 대한 러브 레터인데, 영화의 뒷면이 이렇게 더럽고 추잡할지라도 사랑한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영화가 숭고하고 존엄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사랑한다는 러브 레터인 셈입니다. <바빌론>은 3시간이 넘는 장대한 이야기를 품고 있지만 파티와 촬영장이 전반부와 후반부에 반복되며 거울 구조로 맞대고 있어 정교하게 축조되어 있습니다.


영화 <바빌론>은 1926년부터 1932년까지 무성영화 시대에서 유성영화로 넘어가는 시기를 담고 있습니다. 당시 영화 산업 자체가 크게 변화하였고 배우와 감독 또한 변화에 적응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도태되고 사라진 스타들도 있죠. <바빌론>도 이런 스타들의 삶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예컨대 브래드 피트가 연기한 '잭'이란 인물은 무성 영화 시대의 최고 스타 '존 길버트'를 거의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마고 로비가 연기한 '넬리'는 당시 할리우드에서 섹시한 이미지로 유명했던 '클라라 보'를 떠올리게 합니다. 또한 영화의 많은 부분이 1952년 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를 오마주하고 있습니다. 저한테는 '넬리'는 <사랑은 비를 타고>의 '리나 라몬트'라는 캐릭터의 연장선처럼 보이네요. 웬만하면 <사랑은 비를 타고>를 감상하고 <바빌론>을 감상하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영화 <바빌론>은 인물 중심으로 볼 수도, 영화 예술에 대한 발언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인물 중심으로 볼 경우 이 영화는 한 시대에 변화하지 못해 퇴장한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다들 하나같이 공감하기 어렵고 비호감에 가까운 인물들이긴 하지만 본성을 바꾸라는 사회의 폭압에 저항하다 쓸쓸하게 사라진 숭고한 인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영화 <바빌론>은 한 시대 속에 사라진 인물들을 어루만지며 위로하는 듯합니다. 영화의 엔딩은 새드 엔딩으로도, 해피 엔딩으로도 해석될 수도 있어 다층적으로 느껴지네요.



영화 예술에 대해 살펴보면 앞서 말한 영화에 보내는 러브 레터로 볼 수 있습니다. 영화가 굉장한 가치를 지니고 있어서 사랑한다기보단 저속하고 형편없을지라도 그 자체로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바빌론>은 후반부에서 영화가 우리에게 남긴 영원한 순간들을 웅대하게 연결합니다. 결국 영화가 아름답지 않더라도 관객이 영화에서 영원을 얻어내는 찬란한 순간이 있기에, 영화를 그 자체로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 또한 그렇기에 영화를 영원히 사랑할 수밖에 없고요.



배우들의 연기가 정말 탁월한 영화입니다. 브래드 피트와 디에고 칼바도 훌륭하지만 마고 로비가 단연코 눈에 띄네요. 마고 로비의 자유로움이 묻어나는 표정과 움직임이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예전에도 훌륭한 연기를 많이 선보였지만 <바빌론>에서 그녀의 연기는 대표작으로 남을 만큼 뛰어나네요. 극 중 '넬리'의 아버지를 연기한 '에릭 로버츠'가 마고 로비를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비교하며 칭찬했다고 전해지는데, 저 또한 이에 동의하고 싶네요. 다만 이번 9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노미네이션 되지 못해 많이 아쉽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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