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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순범 May 12. 2023

<스펜서>, 크리스틴 스튜어트라는 위대한 배우

위대한 배우는 존재만으로 영화의 분위기를 바꾼다.

2022년 4월 4일에 블로그에 쓴 영화 <스펜서>의 글입니다. 찰스 3세 즉위 기념(?)으로 브런치 스토리에도 올립니다.

위대한 배우는 존재만으로 영화의 분위기를 뒤바꾸는 힘이 있다. 알 파치노가 그랬고 와킨 피닉스도 그랬다. 그리고 크리스틴 스튜어트도 그렇다. 연기 경력과 나이를 생각하면 섣부른 감이 있지만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위대한' 배우다.



영화 <스펜서>는 주방장 역을 맡은 션 해리스와 매기 역을 맡은 셀리 호킨스도 출연하다. 둘 다 뛰어난 연기력의 소유자이고 영화 내에서도 돋보인다. 하지만 <스펜서>를 보고나면 오로지 크리스틴 스튜어트만 생각난다. 영화 내에서 그녀가 가장 눈에 들어온다. <스펜서>는 온전히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영화다.



크리스틴의 연기는 흡사 '다이애나 스펜서'라는 인물의 삶을 온전히 체득하고 표현한다. <스펜서>의 아무 시간대나 멈추고 10초정도 돌려도 크리스틴은 다이애나로 보인다. 영화는 91년도 크리스마스를 전후로 단 3일간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우리는 다이애나의 삶의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 그녀는 치열하게 표정과 몸짓을 표현한다. 심지어 손짓과 손톱까지 연기하는 것만 같다. 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영국 억양까지 완벽하게 구사하는 크리스틴은 다이애나, 그 자체를 연기한다. 크리스틴의 시종일관 불안한 눈빛은 '배우는 눈을 파는 직업이다'라는 마이클 케인의 말에 완벽하게 어울린다. 식사자리에서 숨 막힐 것 같은 시선에 불안한 눈빛으로 억지로 스프와 진주를 먹는 장면이나, 후반부에 춤을 추는 장면은 크리스틴의 필모그래피에 길이 남을 만한 장면이다.



<스펜서>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크리스틴의 연기이지만, 그 외에 요소도 전부 훌륭하다. 먼저 음악을 짚고 넘어가고 싶다. 조니 그린우드가 만들어낸 <스펜서>의 영화음악은 정말 탁월하다. 겉은 멀쩡해도 속은 뒤틀린 것에 대한 이야기를 완벽하게 표현하는 음악이다. 재즈와 클래식을 기반으로 불규칙적인 음악을 만들어내는데 흡사 어딘가에 존재할 것만 같은 혼돈을 표현하는 듯하다.



이 영화는 첫 장면부터 좋다. 군용 차량이 들어오면서 영화가 시작되는데 이 때 차량은 죽어있는 꿩을 스쳐 지나간다. 추후에 꿩의 의미를 알고나면 상징적인 장면이다. 그리고 다이애나가 한 음식점에 들어가 사람들에게 "여기가 어디죠(Where am I)"라고 묻는다. 다이애나는 길을 잃었고 여기가 어딘지 전혀 모른다. 이는 현재 다이애나의 심적 위치를 알려주는 대사다. 즉 <스펜서>는 자신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다.



그리고 차량들이 왕실 별장에 입장한다. 이 때 사용하는 촬영기법은 버드아이뷰(Bird eye view)이다. 버드아이뷰는 새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높은 하늘에서 찍는 촬영이다. 이는 인물과 건물을 흡사 장난감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 즉 영국 왕실 자체가 장난감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곳을 다이애나가 들어간다. 이는 영국 왕실이 '인형의 집'이며 다이애나는 그곳의 '인형'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스펜서>는 상징과 비유, 대비로 이야기를 탁월하게 확장해 나간다. 다이애나는 자신이 살던 곳에서 허수아비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 허수아비가 입은 옷을 가져온다. 이것은 행복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다. 자신을 옥죄여오는 현재와 대비된다. 진주목걸이는 다이애나를 구속하는 영국 왕실의 족쇄이다. 이것은 남편 찰스가 바람 피던 상대에게도 주었던 선물이다. 다이애나는 크리스마스 행사가 끝나고 아들에게 '제인 시모어'를 봤다고 한다. 아들은 누구인지 몰라 어리둥절한다. 제인 시모어는 영화에 중요 소재로 등장하는 앤 불린이 사형 당한 후 헨리 8세와 결혼한 여자이다. 즉 다이애나는 당시 남편 찰스와 바람을 피던 '카밀라 파커볼스'를 제인 시모어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다이애나는 영화 내에서 총 3번 비유된다. 꿩, 말, 앤 불린이 바로 그것이다. 꿩은 영화에서 '예쁘지만 똑똑하지 않은 것'으로 묘사된다. 사육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총을 쏴도 잘 도망가지 못한다. 사냥 당하면 훼손 부위에 따라 직원들이 나눠가지고 남는건 버린다. 이는 다이애나에 대한 비유이다. 다이애나도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뒤틀려있다. 결혼과 왕실 때문에 도망가지 못한다. 또한 파파라치들은 카메라 렌즈로 다이애나를 사냥하며 자극적인 기사만 생산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이애나는 꿩을 보면 날아가버리라고 말하며 지키고 싶어한다. 사실 날아가버리라는 말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그레고리 소령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말도 다이애나에 대한 비유처럼 보인다. 소령은 벨파스트 폭동 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친구가 말을 한 마리 키웠는데 길들이기 어려운 말이었다. 길들이기 위한 방법을 말하려고 하는 순간 친구는 총에 맞아 죽는다. 그 이야기를 들은 다이애나는 말이 길들여지지 않았기를 바란다. 자신 또한 왕실에 길들여지지 않고 자유를 바라는 마음이다.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비유는 바로 앤 불린이다. 앤 불린은 헨리 8세의 아내였으나 간통을 저질렀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한 인물이다.(영화에선 순교자라고 표현된다.) 앤 불린의 삶이 다이애나의 현재 상황과 유사하다. 디저트를 먹어야 하지만 몸이 안 좋다고 말하며 밖을 향해 걸어가는 장면에서 다이애나는 앤 불린과 동일시된다. 그 순간 다이애나는 영국 왕실의 별장이 아닌, 자신이 살았던 진정한 의미의 집으로 떠난다.



다이애나가 집으로 가서 마주한 것은 과거의 자신이다. 그곳에서 행복했던 과거를 떠올린다. 행복했던 과거와 달리 비극적인 현재에 비관한 그녀는 계단에서 떨어지려고 한다. 그 순간 앤 불린이 나타나 목걸이를 뜯어버리고 도망치라고 한다. 차마 도망치지 못하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앤 불린이 다이애나를 살린 것이다. 도망을 결심한 그녀는 진정한 의미의 웃음을 되찾는다.(아들을 만나는 장면을 제외하면 이 장면에서 처음 웃는다.) 이 때 다이애나는 여러 가지 옷을 입는데 그 중 검은색 드레스도 있다. 검은색 드레스는 장례식에 입는다는 대사를 생각해보면 이 옷은 왕실의 다이애나를 떠나보내는 의상이다. 왕실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맞이한 다이애나의 몸짓은 행복이 잔뜩 묻어있다.(실제로 다이애나는 어렸을 때 발레를 배웠다.) 그리고 마침내 진주목걸이를 끊으며 왕실의 족쇄를 끊어낸다.



다이애나는 더이상 드레스를 입지 않고 평상복을 입는다. 그리고 허수아비의 옷을 입고 아들과 함께 별장을 탈출한다. 다이애나가 '왕실'의 자신이 아닌 '어린 시절 행복했던'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전하를 사랑하는 사람은 저뿐만이 아닙니다'라는 매기의 메세지를 발견한다. 혼자라고 생각했던 그녀에겐 어둠을 걷어내는 친구 매기가 있었고, 자신을 위해 살구 수플레를 만드는 주방장이 있었으며, 다이애나의 유일한 소원을 들어주었던 그레고리 소령이 있었다. 그들이 건네는 작은 걱정과 위로가 있었다. 이렇게 <스펜서>는 영화적인 언어로 다이애나 스펜서에게 작은 위안을 건넨다.



다이애나는 마침내 행복했던 과거의 상징인 허수아비의 옷을 입고 떠난다. 허울뿐인 왕실의 옷은 허수아비가 대신 입는다. 수플레보다 더 맛있는 자유를 향해 날아간다. 춥지만 난방조차 안하는 별장에서 벗어나 차의 히터를 마음껏 튼다. 아들들과 병사놀이를 하면서 말했던 '완벽한 크리스마스'를 위한 기적을 차안에서 흘러나오는 'Mike + The Mechanics'의 'All I Need Is A Miracle'을 통해 마음껏 만끽한다.(노래의 '내게 필요한건 기적이죠'이라는 가사가 나온다.) 앤 불린의 책은 책상에서 평화로운 안식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자신을 '다이애나'가 아닌 '스펜서'라고 부른다. 누군가의 인형이 아닌 자신으로 살아가겠다는 맹세다. 인형의 집을 나서며, 거꾸로 쓴 신데렐라의 이야기는 완성된다.



영화는 처음에 '실제 비극을 기반으로 꾸며낸 이야기'라는 자막이 나온다. 실제로 다이애나 스펜서는 영화의 배경이 되는 91년도를 지나 92년도에 찰스와 별거를 시작하며 자유를 맞이했으나 97년도에 파파라치를 피해 달아나다가 교통사고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이처럼 다이애나의 삶은 비극적이었지만 영화 <스펜서>는 해피엔딩에 가까운 결말을 보여준다. 어쩌면 힘든 삶을 보냈던 그녀에게 영화가 보내는 위로의 송가가 아니었을까.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마지막에 보여주는 고혹적이며 우아하고, 처량하지만 행복한 표정 속에 다이애나의 지난한 삶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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