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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순범 May 29. 2023

[지금 이 만화] <효정의 발화점>, 사랑은 덮친다.

자신의 몸을 불태워서라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이다. 사랑은 누군가에게 홀려서 사랑하기로 작정한 사람의 내부에서 생을 시작한다.
- 이승우, <사랑의 생애>


불가해한 사랑의 탐구


박선우 작가의 <효정의 발화점>은 주인공 '우효정'이 과거로 되돌아가 고등학교 1학년을 되돌아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시작한 기억의 회고에서 살펴본 우효정의 과거는 그리 다채롭지 않다. 중학생 시절 따돌림을 당하고 이사를 자주 다녀 제대로 된 친구도 없다. 새로 진학한 고등학교도 곧 1년 뒤에 떠나야 한다. 그래서 효정은 친구들과 거리를 두고 싶어 하지만 '이미소'와 '문로솔'이 다가와 대화를 건넨다. 그리고 사랑 때문에 불타오르는 남자, '박하안'을 만난다. 그러니까 <효정의 발화점>은 17살의 소녀를 통한 불가해한 사랑의 탐구이다.



작가의 개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선을 곧게 뻗어 나가는 것과 달리 울퉁불퉁하게 선을 쓴다. 인물들의 얼굴도 흡사 동물의 얼굴에서 가져온 것만 같다. 고양이, 강아지에서 여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동물들의 인상을 활용하여 캐릭터 얼굴의 개성을 살린다. 인물들의 대사도 생기 있게 담겨 있어 시종일관 웃음이 나온다. 무엇보다 작품의 색감이 뛰어나다. 이 작품에서 색감은 상황과 마음을 표현하는 탁월한 미학적 표현이다. 이 작품에서 색감이 독특하게 변하는 순간은 인물들의 감정이 변하거나 일렁이는 순간들이다. 인물들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색감을 통해 전달한다는 점에서 훌륭하다. 작품 내내 서술되는 우효정의 독백 또한 문학적이어서 읽는 내내 흥미롭게 다가온다.



<효정의 발화점>의 주인공은 '우효정'이다. 이름 자체가 굉장히 흥미로운데, 왜냐하면 빠르게 읽으면 '우정'으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효정은 정작 우정과 거리가 가장 먼 인물이다. 사람과의 적당한 거리를 찾지 못해 일찍이 마음의 문을 닫은 '무정'한 인물인 것이다. 그렇게 무정한 인물이 1년의 시간 동안 사람들을 만나며 마음을 문을 여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박하안'을 만나며 사랑의 불가해한 순간을 마주한다.





사랑은 덮친다


이 작품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잊지 못해 처음 불타오르는 사람은 하안이다. 그리고 효정을 그 순간을 마주하며 그 둘의 관계는 시작된다. 하안이 불타오르면 연기가 나지만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효정뿐이다. 그것은 효정이 소문을 통해 하안을 의식하기 시작한 순간 이미 마음속에 하안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감정을 소모하며 자신의 마음을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내던지는 하안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작품의 제목이 <하안의 발화점>이 아니라 <효정의 발화점>인 이유는, 이 순간 효정의 마음이 타오르는 발화점으로 닳아 오르기 때문이다.




사람은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 모르는 사람에게 끌린다. 아는 사람은 편하지만 매혹의 대상이 아니다. 모르는 사람은 편하지 않지만, 때로 매혹의 대상이 된다. 사랑에 필요한 첫 번째 요소는 모르는 사람을 만나거나 이미 아는 상대를 모르는 사람으로 인식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효정이 하안에게 끌린 것은, 하안이 가지고 있는 불타오르는 마음 때문이다. 내가 전혀 모르는 것을 알려고 하는 순간 이미 자신의 마음속에는 상대방이 깊숙이 자리 잡는다. 17살의 효정은 이 감정을 이상하게 여기고 이질적인 것으로 대한다. 당연하다. 사랑은 보편적이지만 개별적이고 특별하게 존재한다. 결국 사랑의 모양과 형태는 '사랑한다'라는 표현으로 정의 내리기 쉬운 것이 아니다. 사랑은 정의 내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불태워서라도 경험하는 것이다.




효정에게 하안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로 괜찮았던 건 아니다. 효정은 '적당한 거리'가 거슬리기 시작했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적당한 거리'이다. 너무 가까우면 서로 다치게 할까 무섭고, 너무 멀어지면 외로워서 슬프다. 그렇게 하안을 향한 효정의 감정은 갑자기 파도처럼 밀려온다. 효정은 자신의 감정이 정확히 언제부터 였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사랑은 덮친다. 덮치는 것은 사건의 속성이다. 사랑하는 자는 자기 속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하는 사랑을 속수무책으로 겪어야 한다.



소중했기에 서투르고 불안한



'네 슬픔의 원인이 나였으면'이라고 생각하는 효정의 마음은 어땠을까. 아무런 관심도 없던 하안에게 '내가 널 살피는 만큼 너도 날 살펴봐줬으면 하는 조바심'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안의 마음을 이해하려 할 때부터 옮겨붙은 불길은 효정의 마음도 발화점에 도달하게 한다. 사랑이란 건 솟구치는 불길 속에 자신을 던지는 것만큼이나 괴로운 것이다. 그 공간에서 벗어나 불길을 끈다 한들 괜찮아지지 않는다. 사랑은 뜨거운 불길만큼이나 마음에 화상 자국을 남긴다. 그토록 고통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사랑을 한다.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효정의 발화점>에서 사랑은 2번 비유된다. 한 번은 폭죽이다. 바닷가에서 효정과 하안은 폭죽을 태운다. 폭죽은 선명하게 타오르지만 이내 꺼진다. 하안은 '아쉽다'라고 말한다. 선명하게 타오르지만 이내 꺼지는 것. 그래서 더욱 아쉬운 것이다. 또 한 번은 효정이 앓는 열병이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하안에게 마음을 전한 효정은  집에 도착하는 순간 심한 열병을 앓는다. 마음을 정리하지 못한 효정은 하안에게 제대로 대화를 할 수 없다. 효정은 서툴고 불안하다. 하지만 그건 진심이었다는 증거이다. 소중하지 않았다면 왜 그토록 마음을 기울였을까. 망설이고 비틀거리고 안절부절못하면서.




<효정의 발화점>은 서로에게 서로가 가장 중요한 존재인 것만으로 충분했던 나날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타인의 영역을 이해하고자 하기 위한 지난한 노력도 드러난다. 무엇보다 이해하기 힘든 사랑의 불가해한 순간을 겪는 효정은 타인에게 조금 더 마음을 연다. 그렇기에 효정은 이사를 떠나면서도 아쉬움을 털어내지 않고 마음속에 고이 간직한다. 불안정하고 무정한 인간이 겪는 불가해한 사랑의 순간이 <효정의 발화점>에 생기롭게 담겨있다.



그 일만은 참 특별했다며 손꼽을 기억



훌륭한 로맨스는 자신만의 사랑의 언어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이런 거다.


"날 사랑한다면 나의 뼈까지 먹어줘"(영화 <본즈 앤 올>)


"내가 널 달에 데려다줄게!"(애니메이션 <사이버펑크: 엣지러너>)


"자기야 나는 너를 매일 다른 이유로 더 사랑했었고"(검정치마의 노래 <한시 오분>)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쇼코를 생각하면 그 애가 나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을까 봐 두려웠었다."(최은영 작가의 <쇼코의 미소>)


<효정의 발화점>은 불길로 사랑의 언어를 표현한다. 솟구치는 불길 속에서 형형하게 표현한 사랑의 마음을 느낀다. 발화점에 도달하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이끌어내어진 불길을 말이다.




다소 독자를 의식한 엔딩이 내심 아쉽다. 앞서 효정과 하안의 관계를 통해 이토록 불가해한 사랑의 성질을 탐구했으면서, 마지막은 '좋아한다'라는 말로 단순하게 매듭지으려고 한다. 사람들은 '사랑한다'라는 같은 말을 하면서 각자 다르게 사랑한다. 효정의 하안의 관계가 1년에 걸쳐 복잡하게 얽혀 있지만 '좋아한다'라는 말로 다소 쉽게 풀어버린 것은 아닐까. 그래도 책을 덮고 나면 열병같이 고통스럽지만, 폭죽처럼 꺼지면 아쉬운 사랑을 경험하고 공감하게 한다. 나 또한 별거 없는 인생에서, 그 일만은 참 특별했다며 손꼽을 기억이 하나쯤은 있을까. 효정처럼 자전거를 타고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노래 한 곡 들으며 기억을 곱씹어 본다.


그때는 알 수 없었지요
왜 나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어쩌면 저주가 아닐까?' 라고도 생각해 봤지만
난 그저 열일곱을 살던 중이었어요
귀가 찢어질뜻 매미가 울던 1999년의 여름 밤
혹독하고 푸르던 계절이 깊게 긁고 간 자리
만약에 그때로 돌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할수 있다면
난 당장 무엇이든지 하겠어요
하지만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아마 같은 실수들을 또 다시 반복하겠지요
그래도 괜찮아요
전부 다 내가 원했던 거에요
이 모든게 다 내가 원했던 거라구요
- 검정치마의 <Flying Bo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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