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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P Feb 01. 2024

나는 (시도 못 읽는) 바보입니다.

240201 오늘의 글쓰기.

학원을 가기 위해서 경의중앙선을 탔어. 앉아 가려고 사람이 가장 적은 골랐지. 지하철이 도착할 때까지 주변에 아무도 없었기에 ‘앉아서 갈 수 있겠지..!’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어. 지하철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가는데,  문의 왼쪽으로 좌석에 앉은 사람들의 머리가 보이는 대신 흰색 벽이 보이더라. 엥? 웬 벽이지? 의자가 없다는 실망감보다 호기심이 먼저 찾아왔어. 두 세 발 정도 더 걸어 들어가 보니, 3칸짜리 책장이 있더라. 독서바람열차라고 책 읽는 문화 확산을 위해 운영하는 열차였던 거야. 홀린 듯이 책장 앞으로 가 책을 풅어봤어. 맨 밑에 칸에는 어린이들이 좋아할 만한 동화책, 쉬운 책들이 있었고, 위 칸으로 올라올수록 읽을 만한 책들이 비치되어 있었어. 처음 골라든 책은 신영배 시인님의 ‘ 그 숲에서 당신을 만날까’라는 시집이었어. 시를 본 지도 꽤 오래되었고, 짧으니까 읽기 좋겠다 싶었지.


근데 웬 걸, 시의 첫 구절을 읽었어. 근데, 이해가 안 되는 거야. 화자가 어떠한 상황인지, 이게 어떤 마음으로 이러한 시가 쓰였는지, 무슨 의미인지 하나도 모르겠더라고. 너무 어려웠어. 시를 보는데, 딱 10년 전 수능공부를 할 때 시를 보던 생각이 드는 거야. 순간 빨리 이걸 이해하고서 뒤로 넘어가 다른 시를 읽어야만 할 것 같은 알 수 없는 조바심이 나를 덮쳤어. 내가 지하철을 타는 시간은 20분. 그중 5분은 이미 지나가 버렸고, 남은 15분 중 내가 이 책의 시를 얼마나 음미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었어. 뭔가 이상하잖아.

정말 이상하지.

시는 문학인데, 왜 이걸 있는 그대로 음미하지 못할까? 시는 효율성의 학문이 아닌데, 내가 꼭 이걸 설명서 보는 것처럼 분석하고 이해해야 할까? 이해가 안 되는데 일단 읽어? 읽다 보면 뜻을 알까? 그럼 이 시집을 읽는 이유가 있을까? 혼란스럽더라고. 결국 책을 몇 장 넘기지 못하고 쭈뼛대며 원래 자리에 다시 넣어놨어. 주입식 교육에게 강하게 한 방 얻어맞고 K.O 된 기분이었어. 시집 하나도 음미하지 못하는 PD지망생이라니, 부끄럽더라. 그다음 황급히 집어든 책은 ‘요즘 어른을 위한 최소한의 맞춤법’이었어. 바닥난 문학적 소양을 들키지 않기 위해 정보전달의 공부서적으로 얼굴을 가린 셈이지. 4월에 만료되는 kbs한국어 성적을 다시 따기 위한 시험을 조금은 의식하기도 했어. 맞춤법 책이라 그런지 새책처럼 깨끗하더라. 다행히도 모르는 맞춤법은 없었어. 모르는 지식이 없다는 것에 위안을 삼으며 지하철에서 내렸지. 맞춤법 책은 시집 옆에 꽂아 줬어.


학원으로 걸어가는 길에 내 머릿속은 수많은 승권들은 진영을 갈라 성토를 하고 있었어. 한쪽은 ‘그 시집 다시 가져와. 내가 꼭 이해하고 말겠어. 그거 시간만 있으면 다 이해할 수 있다니까? 내가 시간이 없어서, 수능시험 볼 때 그 시간 째깍째깍 지나가는 압박감이 떠올라서 그런 거라니까? 나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라며 자신의 국어 능력을 재확인하고 싶어 했지.

반대쪽 친구들은 ’ 시집이 문제가 아니야. 이건 우리가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할 문제야. 솔직히 인정하자. 우린(머릿속 친구들) 여태까지 시를 읽은 적이 없어. 시험을 위해 공부를 했을 뿐. 한 번도 시를 있는 그대로 음미해 본 적 없잖아. 우린 그저 흔한 주입식 교육의 결과물일 뿐이야. 이 부분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해. 그리고 시를 시로서 의미를 재정의하고 들여다봐야 할 필요가 있어.‘

이렇게 머릿속이 아웅다웅하는데 정말, 그 시집 훔쳐올 걸 생각까지 들더라. ‘우린 주입식 교육의 결과물이다 ‘친구들 말이 좀 더 와닿는 거 같아. 그러니까 공부하는 맞춤법 책을 들고서 읽지 않았을까?


시를 이해를 하지 못하니 조바심이 났던 나 스스로가 싫더라. 너무 멋없었어. 예술을 음미하지 못하고 의미를 아득바득 알아내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것처럼 보였어. 문학을 잘 못 배운 사람인거지. PD지망생으로서도 이 부분은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 예능 PD는 세상에 재밌는 이야기를 포착하고 그것을 풀어내는 사람들이라 생각하거든. 예술은 저마다 시사하는 바가 있는 이야기들이고. 그렇기에 예술을 음미하지 못한다는 건 PD로서 좋은 무기를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이 들었어. 이제라도 알았으니 앞으로 노력해 보면 될 문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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