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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P Feb 03. 2024

클리스만보단 차두리

240203 오늘의 글쓰기


아시안컵이 요즘 한창이지. 역대급 스쿼드에 역대급 감독이 지휘하는 여러의미로 역대급 대회가 되어 가는 중이야. 매 경기 후반 추가시간에 골을 넣고 이기는 이 흐름, 각본을 써도 욕먹겠다 싶더라니까. 이런 경기력을 보여주는 클린스만 감독이 중계화면에 잡힐 때마다 애증의 마음으로 응원을하지. 클린스만 감독님이 중계에 잡힐 때 옆에 코치들도 같이 화면에 잡힐 때가 있는데, 그 코치들 중 내 최애 축구선수가 있어. ’ 공보다 빠른 사나이, 차미네이터,‘ 바로 차두리 코치님이지. 전에도 서술했지만 차범근 축구교실을 다니던 시절 난 엄마를 찾는 바람에 축구는 뒷전이었던…. 그런 선수였어. 그 당시 거기서 나랑 뛰던 친구들 중에 선수하는 애들도 분명 있겠지…? 내가 제쳐짐으로써 너희에게 자신감을 심어줬다는 것을 잊지 말아 다오. 그래서 사실상 거기서 배운 축구는 기억이 안 나. 근데 그때 차범근 아저씨랑 두리형이랑 사진을 찍었었어. 그때가 2001년이니까… 아마 월드컵 전이었던 것 같아. 사진이 집 어딘가에 있는데…. 찾아서 나중에 여기에 올려놔야지.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리면 마치 물속에서 눈 뜨는 것처럼 흐릿흐릿 몽글몽글하게 보이는 거 알지? 그런 어릴 적 기억에도 두리형은 눈빛이 선했달까. 다른 건 다 기억 안 나도 눈은 확실하게 기억이나. 눈만 봐도 호감형이시잖아. 인생 처음으로 본 축구선수가 사진도 찍어주고 얼마나 좋았겠어. 그때부터 두리형을 열심히 응원했지.


2010년대엔 두리형 응원이 거의 절정이었던 것 같아. 그전까진 두리형이 해외에서 커리어를 보내고 있었고, 그 당시 축구 중계를 찾아볼 줄 몰랐기에 경기를 볼 수 없었지. 국가대표 경기에서만 볼 수 있었어. 마인츠에서 클롭 감독님을 만나 풀백으로 전향하기 전까지 윙으로 뛰고 있었는데, 잘하는 선수지만 특별한 선수의 단계까진 올라가기 힘들어 보였어. 중3에 축구 선수를 시작하셨는데, 그렇기에 기본기가 조금은 발목을 잡으셨던 거지. 그렇지만 그걸 상회하는 피지컬, 속도를 사용해 사이드에서 직선적인 움직임으로 라인을 파괴하는 스타일을 주로 사용하셨지. 두리형이 크로스를 조금만 더 잘했었다면 아마 엄청난 경쟁력을 가지게 되었을 거야.

그런 두리형이 풀백으로 전향을 하고서, 전성기를 맞은 거지. 30대로 접어들며 얻게 된 축구선수로서의 경험, 짬. 하지만 그럼에도 20대들을 이기는 피지컬, 속도. 이것들은 대한민국 최고의 풀백이 되기에 충분한 조건이었어. 윙으로 뛰던 시절 흔히 ‘공보다 빨리 뛰는 ‘ 속도 때문에 골라인 아웃을 많이 경험했었는데, 풀백으로 뛰니까 출발 지점이 더 아래네? 그럼 더 많이 뛸 수 있잖아. 두리형의 속도를 살리기엔 스프린트 스타트 지점이 윙보단 풀백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온 거지. 그렇게 2010년 최고의 풀백이 되었고, ’ 차미네이터‘라는 별명도 얻었어. 진짜 그 당시 경기를 보면 혼자 보법이 달라. 또 남아공 월드컵 당시 해설은 차범근 님이네? 그래서 아버지가 경기장에서 해설을 하며 아들을 컨트롤러로 조종한다는 ’ 로봇설‘도 있었을 정도였지. 그만큼 빛이 나는 활약이었다~이 말이야. 그런 이미지가 생기니 드리블이 길거나 공을 못 잡을 때면 ‘공보다 빠르니까’라며 넘어갈 수 있을 정도의 까방권이 있었달까. 축구를 보는 사람이라면 이런 까방권을 얻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거야.


사실 차두리 선수님은 2010년 월드컵 전까지 위대한 아버지 차범근 선수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주를 이뤘었어. 플레이 스타일도 굉장히 직선적이라 감독의 전술에 따라 기용이 안 되는 경우도 있었지. 그 결과 2006년엔 월드컵 엔트리에 들지 못했었어. 사람들이 ‘차두리는 끝났다’하던 순간 풀백으로 변신에 성공해 제2의 전성기를 스스로 만들어 냈으니 얼마나 멋있어. 여기에 또 스토리가 있는데, 클롭 감독님이 2005-6 시즌 풀백 변신을 이야기하기 전에, 이미 2002년에 히딩크 감독님도 풀백 전환 권유를 하셨었다고 해. 일찍이 풀백으로서의 재능이 있었지만, 아버지처럼 공격수로 성공하고 싶다는 차두리 선수의 의지가 있어 2002년엔 거절을 했다고 해. 그러다 보니 계속 아버지와 비교가 되었고, 그 아버지느 너무나 대단한 사람이라 뛰어넘기가 힘들었지. 그런 상황 속에서 또 한 번 풀백 전환 권유가 들어왔고, 그때는 주변을 의식하기보단 자신의 강점을 살릴 수 있는 선택을 한 거지. 이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부터가 인간으로서 한 단계 성장하신 것이라 생각해. 스스로를 차범근 그늘에 가두던 두리 선수가 차범근의 아들이 아닌 차두리만의 필드를 만든 것이지.

’그런 두리형이 풀백을 해? 그럼 나도.‘라는 마인드로 풀백을 선택했어. 그리고 거진 15년…?을 풀백으로 뛰었지. 10대 시절엔 뛸 때마다 두리형 같은 플레이를 하고 싶어 달리기를 엄청했어. 다리힘도 기르고 싶어 슈팅연습도 열심히 하고.  그 결과 고등학교 땐 나름 학교 대표도 해보고, 어딜 가나 1인분은 하는 축구인이 될 수 있었어. 한 번은 k7에 체험? 입단 테스트?를 보러 갔어. 이미 팀이 꾸려져 있는 상황이라 난 들어가도 후보겠거니~하며 훈련을 받았지. 마지막에 1군 2군 느낌으로 나뉘어 경기를 하는데, 내가 2군 왼쪽 풀백이었거든. 1군 윙들을 몇 번 막고 코치님들이 뛰란데로 뛰다 보니, 나를 1군 풀백이랑 바꾸는 거야. 내가 1군으로 뛰어도 경쟁력이 있겠구나 싶었나 봐. 그래서 기분이 좋더라고. 속으로 ‘두리형, 제가 5살 때 축구를 제대로 배웠으면 두리형 다음 국대 풀백자리 제거였을까요…’라고 김칫국 좀 마셨다.


어쨌든 나의 두리 형은 2010년 월드컵 최초 원정 16강, 2015년 아시안컵 준우승, k리그 베스트 11에 2번을 드는 전성기를 만끽하고 fc서울에서 2015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하셔. 은퇴식 인터뷰에서 ”항상 아버지 명성에 도전했습니다…. 어느 순간 현실의 벽을 느꼈습니다. 축구를 너무 잘하시다 보니 아무리 잘해도 그 근쳐도 못 가니까 속상했고 한편으로는 아버지가 밉다 “라고 하셨어. 팬으로서 그 인터뷰를 듣는데 너무나 슬프더라. 축구 인생동안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 생각을 하며 사신거야. 평생을 가족, 아버지와 비교되는 삶을 사는 게 얼마나 비극이었을까. 하지만 그것을 귀인의 제안, 그리고 자신의 선택으로 이겨내셨고, 대한민국 역대 최고의 풀백에 등극하셨지. 난 축구선수로도 당연하지만 인간으로서도 너무 멋있는 사람이라 생각해. 낭만 있잖아.


항상 응원합니다 두리형. 오산고 감독하실 때도 잘하셨고, 요즘  테크니컬 어드바이져일도 잘하시고 계시니까 언젠간 국가대표 감독…. 해주세요 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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