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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P Feb 28. 2024

과몰입의 부작용

소개팅남이 애프터에서 폭풍눈물을 흘린다면?

혹자는 말한다. 감수성이 좋아 감정에 푹 빠져들 수 있는 것은 축복이라고. 맞는 말이야.

하지만 일상에서 마주하는 콘텐츠, 상황마다 푹 빠져들어 감정 컨트롤이 쉽지 않다면 그건 생각보다 힘든 삶이야. 진짜로.


난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 영화 보는 걸 꺼려했어. 특히 한국영화는 친구들과 절대 보지 않았어. 영화 1편을 보면 최소 1번은 꼭 울어야 했거든.


왜 옛날 한국 영화의 주인공들은 죽어야만 했던 걸까? 슬로모션을 걸고 주마등처럼 그들의 추억이 스쳐 지나간 자리에 주인공의 눈동자 속 눈물을 보여주며 아름다운 희생을 해야 했을까? 이제 그것이 ‘한국식 신파’라는 장르라는 걸 잘 알지만, 그런 장르를 알 턱이 없던 어린 시절 나에겐 스크린 속 세계는 감당하기 힘들 만큼 잔인했어. 안 울려고 일부로 ’아, 저 여자주인공 죽겠네. 마지막 탈출하다가 총 맞아서 죽겠구먼. 안 울 수 있겠다.’라고 혼자 되뇌기도 했었지만, 인물들의 모든 감정에 다 이입을 해버린 난 엔딩 부분에서 울고 있었지.


지금 생각하면 그만큼 감정이 다양하고 섬세하다는 장점이 있는 거지만, 어릴 적엔 ‘난 여리고 약해.’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엄청나게 거센 경상도 남자인 아빠와 할아버지는 ‘남자는 우는 거 아니다’라고 울 때마다 날 혼냈지. 그래서 난 울지 않기 위해 ‘영화 보며 울지 않기 두 가지 전략’을 세웠어


1. 공포영화를 본다

2. 신파 없는 외국 액션(마블)을 본다.

1N살 친구가 생각한 것 치고 꽤나 괜찮은 전략 아니야? 1번은 그렇다 쳐도 2번은 정말 괜찮은 전략이었어. 친구들과 저런 영화들을 보고 집에 와선 내 방에서 혼자 다양한 드라마들을 보며 눈물을 흘렸고, 스스로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연습했었어.


시간이 흘러 대학생 새내기가 되었고, 정말 두고두고 부끄러운 일이 생기지.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던 20살. 그전 연애의 기억이 흐려질 즈음, 미팅을 나가게 돼. 그리고 내 짝과 애프터를 하게 됐지.


연극을 보자는 상대분의 카톡을 받았고, ‘내가 재밌는 걸로 찾아볼게!’라고 답장을 보내며 인터넷을 켰어.

난 진심으로 ’ 재밌는 ‘ 걸 보고 싶었어. 조금의 신파도 허락할 수 없지. 미팅 애프터를 나가서 사실상 처음 보는 여자 앞에서 울 순 없으니까… 열심히 재미만! 있는 연극을 찾았어.

대다수의 연극들이 ‘눈물 콧물 다 뺐어요!’ ‘처음엔 재밌고 나중엔 슬프고 흑흑’이런 리뷰가 태반이더라.

하지만 그중에 ’ 들어가는 순간부터 나오는 순간까지 웃기만 하다 나왔네요 ‘, ’ 진짜 배꼽이 없어져서 응급실 갈 뻔했어요 ‘라는 댓글들만 달린 연극을 발견한 거야. 이름이 뭐더라….‘수상한 흥신소 1’이었다. 


이거다.


애프터 상대분에게 이 연극이 정말 재밌다고 강력 추천을 했고, 상대분도 아직 본 없는 연극이라며 좋아했지.

오케이 계획대로 되고 있어!

재밌게 웃고 나와서, 그다음은 그때 가서 생각해 보자! (이땐 몰랐다… 데이트 코스를 계획해 가는 것이 기본 매너임을…. 참 어린 20살… 미안했다 애프터 한 친구야.)가 내 계획이었어.


그날 내 옷도 정확히 기억해. 살짝 하늘색과 코발트블루의 중간정도…. 밝기의 니트를 입고 갔어. 첫 미팅에 첫 애프터였으니 설레기도 하고, 잘해보고 싶은 마음도 들고 마음이 붕붕 떠 있었어. 약간의 어색함과 설레는 긴장감이 뒤섞여서 기분 좋은 어지러움을 느끼면서 그녀와 인사했지. 극장으로 가는 길에 상대분 친구들도 만나서 인사도 드리고 긴장감을 해소하기 위해 스몰토크로 분위기를 풀었어. 그리고 ‘연극이 진짜 너무 죽인대. 엄청 재밌대’라고 하며 연극에 대한 기대감을 점점 키웠지.


실제로 연극이 정말 죽여줬어. 사회적인 나의 자아를 죽인 것 같았어.


연극이 너무너무 슬픈 거야. 연극의 내용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애프터 상대와 불과 10CM 정도 떨어져 앉아서,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았어. 훌쩍훌쩍하면 어깨가 들리는 거 알지. 그 모션을 취하지 않기 위해서 입술을 꽉 깨물고 손으로 무릎을 꼬집었어.

연극 중간중간 암전이 될 때마다 숨을 몰아쉬며 니트로 눈물을 닦았어. 다시 불이 켜졌을 때는 아무렇지 않을 척 연기했지. 무대에서 눈을 띌 수는 없었어. 그렇다면 옆사람이 날 쳐다볼 것 같았어. 그럼 퉁퉁 부은 눈이 보일 것 같았거든.

그렇게 무대 위에서 ‘울어! 울어! 이래도 안 울어!’라며 본업에 최선을 하다는 배우들과 그 감정들을 보면서 애써 무시하려 하는 나와의 대결이 시작되었지. 처음부터 불리했던 이 대결의 결과는 어땠을까.

연극이 끝나고 나니까 니트의 눈물 닦은 부분만 찐 파란색을 넘어 탁해졌더라….


첫 애프터에 진짜 펑펑 울어버렸다.  너무 부끄러운 거야….

연극이 끝나고 어두운 복도를 나와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어.


‘내가 지금 말하면 목소리가 떨릴까, 안 떨릴까? 내가 우는 걸 눈치챘나? 내가 먼저 연극 어땠냐고 물어볼까? 이제 집으로 뛰어가면 되나? 와 어떡하지?‘ 온갖 생각을 하는데 여자애가 먼저 말을 건넸지


“저… 휴지 줄까?”

아. 알고 있구나. 하하. 이렇게 된 거, 모르겠다.

“아냐 괜찮아~ 눈에 먼지가 들어갔었네!”

“ㅋㅋㅋ 그런 것치곤 꽤나 오래 울던데?”

“아… 하하 갑자기 엄마 생각이 나서…”라며 계단을 내려왔어.


상대방 친구에게 너무 미안했어. 뭔가 이런 모습을 바라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었거든.

그래서 그때는 진짜 망했다. 끝이다라고 생각했었다는……너무나 부끄러운 이야기.




지금도 감수성이 풍부하지만!! 이젠 컨트롤을 잘해서 꺼낼 때 안에 넣어둘 때를 나름 조절할 수 있는 것 같아.

오히려 이 감수성이 남의 감정을 알아채고 원하는 부분을 긁어줄 때 엄청 효과적인 나만의 무기가 되어 준 것 같달까…이 얘기는 다음에 또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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