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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P Mar 04. 2024

3인칭 취준생 시점으로 본 대학교 개강.

나영석 피디님이 찾아준 내 자존감. 감사합니다.

‘띠링’ 동이 틀 때쯤 잠이 든 나를 깨운 건 문자 한 통이었다.


[web 발신]

안녕하세요, 고시반 행정 지원실입니다. 금일은 고시반 퇴실일입니다….. 남은 물품 전부 무통보 폐기됩니다…..


벌써 시간이 그리 되었나. 고시반에서 퇴실을 해야 하는 시즌이 왔다는 건,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었다는 뜻이지. 핸드폰 바탕화면을 보니 3월 4일 월요일.


대학생 친구들 개강하는 날이구나. ’아휴, 학교까지 또 언제가. 그래도 책은 아까우니까…. 가긴 가야겠다 ‘ 잠이 덜 깬 채로 침대에서 부비적 대다가, 몸을 화장실로 끌고 갔다.


머리를 감고 이를 닦으며 거울을 본다. 벌써 수염이 자랐다. 성장세가 남다르다. 주말마다 물을 주던 우리 농장에 잡초만큼 빨리 자란다. 자르고 갈까…? 그냥 갈까….?

작년만 되었어도 수염을 자르고 멀끔하게 갔을 테지만, 이젠 귀찮다. 아는 사람도 없는데 뭐, 마스크를 쓰고 가기로 결정! 그리고 잡초 같은 수염 옆에 애지중지하며 기르는 구레나룻이 눈에 들어오네.

‘수염이 자랄게 아니라 머리가 자라야 하는데… 이거 수염 자라면 머리는 안 자라는 거 아니야?’ 20살, 대학생 때는 하지도 않던 탈모 걱정을 해본다. 조심스럽게 머리를 숙여 정수리 부분을 체크한다. 다행히 아직은 잘 붙어있다.


지하철을 타려고 역에 갔다. 시간대는 사람이 제일 없는 오후 4시. 학교를 9년째 가다 보니 사람이 많은 시간대는 무조건 피하고 싶었다. 지하철 속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뺏기기엔 내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가 소중하니까. 운이 좋게 바로 자리에 앉았다.

화정역에서 원당역을 가는 길에 성라 공원이 보이는데, 작년에 나왔던 드라마 ‘이두나‘ 촬영지이기도 하다. 벚꽃이 정말 예쁘다. 물론 아직 벚꽃이 피지는 않았지만, 그 공원의 벚꽃을 보며 등교하는 것을 즐겼다. 내가 생각하는 대학교의 ’ 생기발랄함‘과 어울리는 공원이라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지도.

오랜만에 공원을 지나쳤는데 딱히 설레지 않은 느낌... 오히려 꽃이 피지 않은 그 적막한 공원이 나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그때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와 나 28살이다!  ‘우와 나 진짜 졸업했다! 이젠 학생이 아니다!’


학교에 소속된 사람은 아니지만 학교에 가는 이 기분이 뭐랄까…. 이상하다. 그때 선배 형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20살 새내기 때는 복학생 23,24 형들이 정말 무슨 아저씨라고 느꼈고, 꼰대들이라 생각했다. 물론 진짜 꼰대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형들은 착했다.

내가 복학을 하고 취준을 하며 졸업하고도 학교에 있는 형들을 보고서 ‘왜 아직도 학교에…?’라는 생각을 했었다. 사회로 나아가지 못하고 대학이라는 안전가옥에 머무르는 사람들이라 생각했었다. 가끔은 ‘한량인가?’ 싶은 형들을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나쁜 건 아니라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은 한심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도 뭐, 개개인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가니까. 결국 잘 해낼 사람들이라 생각해 걱정은 하지 않았다. 형들을 가끔 보면 반갑게 인사했다. 예전과 달라진 건 나이 밖에 없었지만, 무언가 형들의 눈빛이 어두워 보여서 좀 측은했었다. 그 눈빛은 무얼 말하고 싶었을까.


지하철은 지하로 들어가 어두워졌다. 공원이 보이던 창문에는 내 얼굴이 보였다. 어쩌면 지금 내 눈도 그 형들처럼 조금은 어두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내 눈을 보면서 ’ 취업을 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나오는 조바심, 내가 한심한 사람처럼 보일까? 약간의 씁쓸함, 건너편 과잠입은 대학생을 보면서 느낀 부러움.‘ 등등 복합적 감정을 느꼈다. 어쩌면 내가 한심하게 생각했던 형들이 지금의 나 일수도…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쁜 생각.


학교에 도착했다. 6번 출구 앞에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데, 굉장히 고령의 할머니가 우산을 지팡이처럼 짚으시며 에스컬레이터를 향해 올라가시고 있었다. 그리고 같이 지하철을 내린 학생들은 그런 할머니 앞을 지나쳐 에스컬레이터를 올라가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수업이 곧 시작할 타이밍이었다. ’ 그래 첫날부터 지각은 좀 그렇지 ‘라 생각하며 나는 할머니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시간 부자인 나에게 그 시간은 아깝지 않았다. 내 뒤에 아무도 없었기에, 내가 할머님 뒤에 서있어야 안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할머니를 도와드리진 않았다. 그저 안전하게 올라가시는 걸 지켜보니만 했다. 몇 번이나 도와드릴까 생각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학교에 들어서니 사람이 많았다. 내뿜는 에너지가 부러웠다. 정말 맑고, 힘차고, 역동적인 봄의 느낌이 나는 사람들을 보며 부러웠다. 왠지 나는 조금 늙고 푸석한 느낌일까 지레 쭈구리가 되었다.

은연중 ’ 우와 28살 늙은이다! 뭐 하러 학교 왔냐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무서웠을지도. 하지만 ’ 너네는 안 늙을 것 같냐! 나도 아직 청춘이야!’라며 보이지 않는 상대들과 섀도복싱을 하며 고시반으로 향했다.


고시반 독서실에 들어왔다. 12월 말 내가 마시고 방치해 둔 빈 커피잔들이 날 반겨줬다. 책상 위에는 내가 읽던 책이 놓여있었다.

나영석 피디의 ’어 차피 레이스는 길다 ‘라는 책이었다. 별로 재미는 없지만 마음에 울림을 줬던 책이다. 인생 최전성기 1박 2일을 끝내고,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 여행기를 담은 책. 1박 2일을 보고 PD를 생각했던 나에겐 의미 있는 책이었다. 생각보다 심심한 성격의 나영석 피디를 잘 알 수 있는 책이었다. 굉장히 격양되고 흥분한 모습만 보여줬던 tv속 모습과 다른 성격에 처음에 좀 놀랐었다. 연예인에게 말도 못거는 PD라니, 지금은 혼자 유투브도 하시는데, 정말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 책을 보면서 ‘대한민국 원탑 PD도 이런 고민을 하는데, 내가 하는 고민은 당연한 거지.’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열심히 공부하자고 마음을 다잡았던 생각을 했다.


지난 연말부터 학원에 다니며 열심히 준비했던 나를 돌아봤다. 나쁘지 않은 계획을 세우고, 그에 맞춰 노력하는 나 스스로 좀 괜찮았다. 대한민국의 ‘나이 내려치기’에 스스로가 너무 주눅 들어 있었다는 생각에 부끄러워졌다.


이렇게 자존감, 자신감이 떨어지는 놈이 아닌데 내가!!!


 PD준비를 하면서 조금은 갉아먹힌 내 마음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또 한 번 한심하다고 생각했던 형들에게 미안했다. 속으로 사과 3번 했다.



‘어차피 레이스는 기니까’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개개인의 시간은 다르게 흐르니까. 노력하는 이 시간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지금은 남들보다 조금 느려도, 난 결국 최고의 PD가 될 수 있으니까.


아직 초반이다. 레이스는 내가 멈춰야 끝난다. 그전까지 레이스는 계속된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본 할머님이 떠올랐다. 할머님보단 족히 60살은 어린 내가 못할게 뭐가 있을까. 할머님도 최선을 다해 걸어 나가신 것처럼, 나도 해야겠다.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며 아이패드를 켰고, 이 글을 썼다.


학교에 올 때는 나 스스로를 파릇한 새싹들 사이에 낀 잡초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다 자라서 꽃 피우기 직전의 나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있으면 성라 공원에 예쁜 벚꽃들이 필 것이다. 나의 나무에도 올해는 예쁘고 멋진 꽃들이 피어나기를 기대하며, 열심히 살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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