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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P Apr 01. 2024

행복한 사람의 눈빛.

현장의 맛.

"고생하셨습니다! 그동안 많이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4년 전, 한 달간의 FD 생활을 끝내면 일했던 PD님께 드렸던 인사였다. 주 70~90 시간이 넘는 노동시간이었기에 굉장히 고되고 힘들었다. 갓 전역했던 내가 '차라리 군대 불침번 뺑뺑이가 더 쉽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니까. 그리고 근로계약서를 사전에 작성하지 않아 내 예상을 훨씬 밑도는 월급이었다. 그래서 도중에 나왔다.

그 이후 코로나로 인해 큰 활동을 하지 못했고, 취업을 준비하는 시즌이 다가왔다. 그때 결심했던 건 '인턴 경험이 부족해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그걸 만회할 수 있게 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났다. 항상 합격 문자를 받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문자에는 불이 따라붙었었다.


그러다 보니 조금 지쳤던 것 같다.


목표가 흐려졌다. '이게 맞나..?'싶은 공부. 정해진 답과 나의 개성에서 나오는 신조차 알 수 없는 시너지를 찾아내는 과정은 어려웠다. 누군가를 찍고, 재밌는 상황을 만드는 게 좋았던 난데. 그런 일을 하기 위한 공부가 재미가 없었고 지루했다. 지루할 때마다 만난 친구들이 '넌 정말 PD 잘할 것 같아!'라며 격려를 해줬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그래서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긴 하나…? 현장에서 있던 난 무슨 감정을 느꼈었지'라는 의문이 들었다. 책상에만 앉아서 세상을 바라보며 세상을 그리는 행동은 답답했다.




그러던 와중 대학교 친구가 당일치기 조연출 알바를 제안했다. 하루동안의 알바성 일은 내 취업 준비에 전혀 도움이 안 될 것 같아 조금 고민했다. 감사하게도 담당 PD님이 2~3시간의 시간을 주셨다.

그 시간 동안 예능 프로그램 모니터링을 하며 생각했다. 카메라 뒤에서 움직이는 수많은 사람을 생각해 봤다. 설렐까. 지겨울까. 짜증 날까. 아무 생각이 없을까. 귀찮을까.


나는 저기 서 있다면 어떨까?

그래서 '촬영 현장에 가서 내가 이 일을 좋아하는지 아닌지 다시 한번 알아보자'라고 생각했다.


촬영은 젊은이들의 핫플 성수역 근처에 위치한 카페에서 아침 9시부터 12시간 넘게 진행되었다. 규모가 엄청나게 크진 않지만 그래도 엄연히 일하는 '현장'에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조금은 긴장했던 것 같다.

그래도 즐거웠다.

스텝들의 목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는 스텝용 헤드셋을 차는 게 즐거웠다. 메인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성수동 골목골목을 찾아다니며 '어디를 가야 예쁜 인서트를 찾을 수 있지?'라는 고민을 하는 것도 즐거웠다. 촬영 중간중간 스태프분들과 담소를 나누며 이야기하다가도 촬영을 시작하는 분위기가 되면 재빠르게 사람들과 함께하는 게 재밌었다.. 그분들이 멋져 보였다. 나는 하루 알바라서 조금 가볍게 놀러 온 것처럼 보이진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그렇게 보이기도 싫었고, 그건 그들의 업을 무시하는 행동이라 생각해서 더 열심히 뛰었다.


실수도 했다.

실시간으로 상황이 변하는 촬영 현장에 100%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재밌었다. 4년 전에는 계획한 것이 틀어지면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고, 어떻게 커버하지?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이번에는 '야, 실수했네? 만회해야지.' 하며 뛰어다녔다. 성수동 거리를 뛰어다니며 '조금은 성장했나…?'싶기도 해서 좋았다.


촬영이 거의 끝나갈 때, 화장실에 갔다가 거울 속 얼굴을 봤다. 초췌한 얼굴이었다. 눈은 달랐다. 촬영 시작 전 지하철에 비친 눈보다 행복해 보였다.


'그래, 이런 맛이 있었지.'

이 맛을 느끼고 싶어서 내가 준비했었구나. 그때 느꼈다.


끝났다. 성수역으로 걸어가는 길에 다리는 천근만근 무거웠다. 하지만 발걸음은 가벼웠다. 일요일 자정이 되어야 전남 구례에서 올라와 다음 날 아침 7시 반에 집에서 나와야 했기에 체력적 부담이 될지 조금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오히려 각성이 된 것 같았다. 책상 앞에 앉아 있어 흐릿해지던 목표에 다시금 초점이 맞춰진 하루였다.


하루종일 같이 다니신 PD님께 하던 인사를 되새기며, 그 말이 만우절 기념 거짓말이 되지 않도록 책상 앞에 더욱 열심히 붙어 있어야겠다.


"고생하셨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현장에서 봬요!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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