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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P Mar 25. 2024

엄마의 걸음.

버거킹에서 버거를 시켜 앉았다. 이 세상에 나, 햄버거 세트, 유튜브만 존재하는 나만의 절대 영역. 밥 먹을 땐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잖아. 이 영역을 확고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에어팟의 '노이즈 캔슬링'이 필수인 거 다들 아시죠…. 나만의 공간 확보를 위해 노이즈 캔슬링을 위해 손가락을 에어팟으로 가져가던 때, 뒷자리에 앉아있던 아주머니들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왔어.


"그 새로 온 학원 셔틀버스 선생~. 있잖아. 그 사람이 일을~~~"


자식들이 다니는 학원 셔틀버스 통학 선생님 얘기를 하는 거야. 순간 내가 뜨끔했어. 우리 엄마가 몇 주 전에 딱 그 직무로 일을 시작하셨거든. '통학 버스 선생'이라는 단어가 내 절대 영역에 금을 냈고, 공간이 와장창 무너졌지. 하지만 그 아주머니들의 이야기가 너무 궁금했어. 노이즈 캔슬링하려던 손가락을 내리고 오히려 유튜브도 껐어. 그리고선 아주머니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지.


우리 엄마는 나를 낳기 전까지 디자이너로 일하셨어. 내가 미술에 감각이 전혀 없어서 설마 우리 엄마가 디자이너였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 결혼하고 집안일을 위해 퇴사를 하시고 나와 동생을 키우신 거야. 내가 6살 때 한복 장사를 크게 하셔서 2년 정도 사업을 하신 적도 있었지만,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자식들을 위해 자신의 커리어를 멈추셨지. 몇 년 전에 사회복지사 수업을 받고 자격증도 따냈지만, 집안 사정 때문에 결국 또 일을 하지는 못하셨었거든


그런 우리 엄마가 작년에 '닥터 차정숙'이라는 드라마를 보더니, 일이 다시 하고 싶어지셨나 봐. 큰아들은 취업 준비 중이고, 작은 아들놈은 취업 보장된 학교에 다니는 엄마의 상황이 '닥터 차정숙' 속 엄정화의 상황과 비슷했기 때문일까. '공부할 때 가장 행복했다'는 이유로 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의사 레지던트가 된 차정숙의 모습을 본 엄마가 감명을 받았을까. 그게 무엇이든 드라마가 멈춰있던 엄마의 경력상 발걸음을 몇십 년 만에 다시 움직이게 했다는 거지.

닥터 차정숙에서는 차정숙이 의대 전공의시험을 통과하는데, 우리 엄마는 직업 사이트를 찾아봤지. 시험학원 통학버스에서 아이들을 안전하게 귀가시켜 주는 아주 중요한 일을 하게 된 거지. 이런 상황에서 아줌마들의 뒷담의 대상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야.


 '저 아줌마들이 욕하는 사람이 우리 엄마면 어떡하지? 우리 엄마가 그런 행동을 할 사람은 아닌데. 자기들이 뭘 안다고 함부로 말하는 거야. 가서 확 버거 엎고 감튀 날려버려?' 유튜브 보는 것보다 헐 씐 더 열심히 더 열심히, 격렬하게 아주머니들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아. 다행히 우리 엄마 얘기는 아니더라.



가슴을 쓸어내리며 감튀를 집었어. 그리곤 '우리 엄마도 내가 아니라면 계속 일을 하셨겠지? 혹시나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될 재능이었으면 너무 아쉬운데' 같은 생각을 했어.

어렸을 때는 엄마가 집에 있는 게 당연하다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어가며 '내' 삶이 중요함을 느끼는 게, 우리 엄마는 가정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내어준 생각이 들었어. 물론 아빠도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직장'에 자신의 삶을 바쳤지만, 엄마는 가족 모두를 돌봐주기 위해 몇십 년을 쓴 거잖아.


그렇게 생각하니 우리 엄마가 다시 걷기 시작한 커리어 발걸음이 소중하게 더 느껴졌달까. 응원해 주고 싶었지.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는 엄마 출근 전에 내가 밥을 해. 매일은 아니지만 조금은 편하게 출근하시라는 큰 뜻...이지. 막상 엄마한테는 '너무 배고파서 미리 밥 준비할 테니까 빨리 와'라는 식으로 말하긴 하지만.


저번 주 주말에는 내가 준비하는 프로그램 기획안 준비랑 저녁 준비 겸사겸사 돈가스를 직접 만들어 봤거든? 근데 처음이라서 끓는 기름 앞에서 한 시간을 서 있게 된 거야. 그 덕분에 얼굴에 열화상을 입었는지 얼굴이 시뻘게졌더라고…. 돈가스를 먹고 엄마와 함께 얼굴에 팩을 했어. 그래도 행복하게 돈가스를 먹는 엄마를 보니까 뿌듯하더라!



버스에서 애들 내려줄 때 차 항상 조심하고 오래오래 즐겁게 일하자 엄마!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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