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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P Jan 22. 2024

23.01.22 글쓰기 연습

바냐 아저씨와 가족.


일요일에 ‘바냐의 시간’이라는 연극 쇼케이스를 관람하고 왔다. 항상 ‘세상에 다시없을 유일한 쇼케이스(연극)’라 생각하며 연극을 즐기기에 이 쇼케이스 역시 기대가 되었다. 안톤 체호프의 두 번째 장막극인 ‘바냐 아저씨’의 줄거리를 연출가와 다수의 화자들을 통해 전달하는 신선한 형식의 연극 쇼케이스였다. 배역의 이름이 화자라니, 쇼케이스는 처음이었기에 시작 전 무대를 바라보며 ‘러프하다는 게 배역 이름에도 포함되나…?’라고 생각했다. 극을 다 본 이후에는 화자라는 이름을 설정한 이유는 그들이 누군가를 연기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바냐 삼촌 속 인물들을 설명하는 것이 더 중요했기에 모두가 화자라는 배역을 맡은 것이란 생각을 했다.


쇼케이스는 즉흥으로 자기소개를 한 후, ‘바냐 삼촌’의 하이라이트인 바냐가 세레브랴코프에게 총을 겨누는 장면을 묘사하며 시작한다. 그리곤 마치 연습실에 의자를 하나씩 놓고 둘러앉아 대본을 읽는 대형을 만든다. 자연스럽게 의자들이 만든 심포지엄 속 중심점에서 무언가가 일어나겠구나,라는 생각을 들게 했다. 그리고서는 주요 인물인 세레브랴코프, 바냐, 엘레나, 소냐, 아스뜨로프의 성격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이때 연출가 겸 화자를 맡은 배우는 우리에게 설명을 해주려는 듯한 톤과 매너로 대사를 했다. 그리고 이 연출가라는 사람을 통해서 전체적인 설명하고 싶은 장면의 집중력을 높이고, 반대로 집중력을 깨트려 상황을 환기하는 역할을 잘 수행했다. 덕분에 ‘바냐 삼촌’을 부분 부분 연습하는 극단의 모습을 구경 온 사람들에게 큐레이팅을 해주는 느낌이 들었다. 또 연극에 있어서 제4의 벽이 꽤나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이를 넘어서려는 시도인 것 같아 신선했다.


연출가와 화자들은 캐릭터들이 가진 ‘상실’을 중심으로 극을 설명했다. 전부 기억할 순 없지만 소냐, 엘레나, 바냐의 상실을 비중 있게 다루었던 것 같다. 뇌리에 가장 깊게 박힌 장면은 소냐의 상실을 설명할 때였다. 관람객 한분에게 오늘의 소냐로 지목받은 한 남자 배우가 소냐의 특징을 손가락을 접어가며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소냐의 삶을 설명하던 중, 뒤에 있던 여자 배우와 위치가 바뀌며 여자 배우가 “나, 소냐”라는 뉘앙스의 대사를 치며 무대 조명의 중앙으로 들어왔다. 소냐가 된 배우는 소냐의 상실을 보여줬다. 그전까지는 가볍게 서로 의견을 주고받던 분위기에서 일순간 모두의 집중을 자신에게 가져왔고, 소냐가 되어 자신의 상실에 슬퍼하며 울음을 참는 모습은 강한 인상을 주었다. 여담이지만 소냐를 설명하던 배우분들은 예쁘고 잘생겼는데 ‘소냐’가 자꾸 못생겼다 하니 ‘나는 뭐 마구간에 말쯤 되나’ 싶어 연극 도중 핸드폰을 들어 내 얼굴을 한번 확인했었다. 말보단 나았다.


왜 상실을 중심으로 극을 설명했을까. 백 년도 더 된 극을 더 잘 설명하기 위해서는 시대적인 배경을 중심으로 설명을 하는 게 더 바냐 아저씨를 이해시키기에는 더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 쇼케이스는 감정을 통해 이야기를 설명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다는 것은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루 동안 생각을 해 보았다. 외모, 꿈과 의지, 더 나아가 사랑과 시간의 상실을 보여주며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난 내 나름의 답을 마지막 장면에서 찾았다. 소냐에게 자살조차 제지당한 바냐는 책상에 안자 장부를 적는다. 소냐는 그 옆에 앉자 바냐는 소냐의 품에 안겨 울음을 흘린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바냐의 말에 소냐는 “일을 해요”라고 대답한다. 그러고선 ’바냐의 시간‘은 끝이 났다. 상실의 감정만을 보여주고 싶었다면 그저 바냐의 불안함을 화자들이 직접 의자를 쌓으며 표현하는 것으로 끝냈어도 된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 장면을 통해 사랑과 시간의 상실 속에도 결국 마지막에 남아 있는 건 ’가족‘임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겨울이 되면 뉴스에 심심치 않게 무연고 독거노인의 사망 뉴스가 나온다. 생기 없는 그들의 방안을 보면 사랑 또한 없음을 느껴 슬펐다. 그 바냐들에게도 소냐들이 있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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