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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없는 셔틀버스

by 예P

밤바람을 감상하기엔 많이 쌀쌀한 1월의 밤, 헬스장에 들러 운동을 하고 오는 길이었다.

매일 이 시간이면 집 앞에 노란색 셔틀버스가 한 대 서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이 시간에 학원생을 데려다 주나?’라는 생각을 했었겠지만, 이제는 택배 배달을 하는 사장님의 셔틀버스라는 것을 안다.


코로나19가 터진 2020년. 5년이 지났지만, 아직 코로나의 지옥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여러 자영업자가 타격을 받았지만, 예체능 학원을 운영하는 자영업자들의 피해가 특히 심했다. 한 타임에 20~30명을 데리고 수업하던 학원은 5명 제한이 걸리자, 수업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살아남기 위해 학원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데려다주던 셔틀버스로 그들의 집에 택배를 배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밤마다 ‘학생 없는 셔틀버스’가 많아졌다. 처음 그 모습을 봤을 땐 마음이 쓰였다.

내가 아는 분도 아니지만, 해줄 수 있는 것도 없지만, 괜히.


하지만 그것도 5년이 지났다.

오늘도 집 앞에 셔틀버스 한 대가 보였다. 처음 보는 셔틀버스였다.

‘오, 배달하시는 분이 바뀌었나.’

엘리베이터를 보니 최고층을 찍고 내려오고 있는 중. 1층에 서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낯익은 얼굴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바로 고등학교 1학년, 학교 검도 수업 때 우리 반을 지도하신 선생님이셨다. 그 당시 우리 반 애들이 속을 썩여 선생님이 눈물을 흘리셨는데, 그때 관장님이 ‘이 선생님, 여자가 누군지 아냐!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내 아내다!’라고 깜짝 고백을 하셨고, 사랑하는 아내를 울리는 건 용서하지 않겠다는 남자의 배포에 우리 모두 감동받아 그 뒤로 수업을 열심히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 강렬한 기억이 있었기에 십 년 만에 뵌 선생님이지만 단번에 알아 뵐 수 있었다. 그런 선생님이 우리 아파트 택배 배달을 하고 계셨다니. 우선 모른 척하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못 볼 광경을 본 것도 아닌데 가슴이 콩닥콩닥거렸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걸까?

검도 학원은 잘하고 계신 걸까. 수업 이후에 수업 장비들을 저 셔틀버스에 옮겨 담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이들과 함께 운동하고, 집에 데려다주는 시간이 천국 같고 즐겁다고 하셨었다.

그 셔틀버스로 택배를 배달하시는 선생님은 무슨 심정일까. 마냥 행복하진 않을 것이다.


인터넷에 선생님 검도관 검색을 해봤다. 작년 6월에 철거했다는 블로그 철거 전문 기사의 글을 봤다. 검도장을 그만두신 후 택배 부업을 시작하신 걸까. 힘든 시간을 보내셨을 거라 생각하니 더욱 마음이 쓰였다. 블로거가 선생님 검도장 장비를 ‘폐기물’이라는 명칭으로 사진을 찍어 올려놨다. 지가 뭘 알아.


그 뒤로 매일 같은 시간 학생 없는 셔틀버스를 관찰하는 버릇이 생겼다. 매일 밤 10시 40분~ 11시 사이. 선생님의 셔틀버스는 아파트 앞에 도착한다. 쿠팡 이츠를 배달하시고, 다른 택배들도 배달하시는 선생님. 셔틀버스를 관찰하며 ‘인사드릴까?’ ‘선생님이 불편해하시면 어떡하지.’ ‘뭐라도 드릴까. 그게 더 이상하려나’.


주변에 항상 친절하고 도움을 주며 사는 것이 ‘무도인’이라는 선생님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선생님을 지금 내가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고 편견으로 판단하고 있게 되어버리는 건가. 그냥 오랜만에 만난 스승님에게 인사를 건네는 건데, 머리가 복잡했다.

하지만 인사를 드리는 것이 웃어른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예의라 생각했다.


그래서 헬스장에 다녀오던 어느 날, 자연스럽게 마주칠 상황을 만들어 선생님께 인사를 드렸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 십 년 전에 00 고등학교에서 검도 수업 들었던 000입니다.”

선생님은 잠시 놀란 듯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나를 알아봐 주셨다.

“어 그래~ 옹오. 잘 컸구나. 잘 지내지?” 반갑게 인사해 주시는 선생님. 그런 선생님 뒤편으로 조그만 캠핑 수레가 보였다. 목도를 잡고 계시던 손으로 수레를 잡고 계시다니. 선생님의 수레를 대신 들어드려 셔틀버스까지 옮겨 드렸다.


셔틀버스에 수레를 넣는데, 셔틀버스에서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데이식스의 HAPPY였다.’

가슴이 찡해졌다. 살짝 울컥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선생님! 관장님께도 안부 전해주세요!”


선생님께 90도 인사를 드렸고, 셔틀버스가 앞 아파트로 가는 뒷모습에 인사를 한 번 더 했다.


많은 노래 중에 HAPPY가 나오다니

굉장히 밝은 멜로디에 그렇지 못하게 슬픈 가사. ‘행복하고 싶은 사람들’의 노래다. 선생님의 삶이 어떠신지 감히 짐작할 순 없지만, 지금보다 더 행복하셨으면 좋겠다.

항상 올곧고, 정직함을 모토로 살아가는 선생님에게 언젠가 지금보다 더 행복하고 돈 많이 버시는 날이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노래 가사처럼 이대로 계속해서 버티고 있으면, 언젠가 그런 날이 올 것’이다.



Tell them it’s okay to be h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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