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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선영 Aug 19. 2020

겸손에 대하여

코로나의 자가격리와 동선 공개

2020년 1월 20일. 설날을 앞두고 시작한 코로나 19는 겨울을 지나 봄을 넘어 장마처럼 지루하고 폭염처럼 따갑게 퍼붓고 있다.


한창 코로나가 기세를 떨치던 지난봄. 우리 청에도 어김없이 영향을 미쳤다.


검사님과 관련된 피의자가 타 지역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그 재판에 확진자의 접촉자가 방청객으로 참석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기밀이라서 띄엄띄엄 소문으로 들은 것이라 피의자였는지 참고인이었는지도 정확하지 않다.) 아무튼 밀접 접촉자도 아니고 이렇게 건너 건너 접촉자라 자가격리의 대상은 아니었지만, 그때의 공포는 맹렬했으므로 확진자의 접촉자의 접촉자의 접촉자였던 검사님은 혹시나 하는 걱정에 청 내부적인 선제조치로 자가격리 대상이 되었다. 이때는 전 직원이 평소와 조금만 다른 컨디션이거나 외부 활동을 했으면 아예 조기 퇴근을 시켜버리는 분위기였으므로 과하지 않은 거리두기 조치였다.

(검찰청은 공공기관으로 특히 항고나 벌금 등 기한이 정해져 있는 업무가 많아 작장 폐쇄나 재택근무가 힘들다.)


곧 사내 메신저에는 검사님의 동선이 공개되었다.


8시 관사에서 출근.
오전시간 사무실에서 계속 근무
12시 점심시간 사무실에서 혼자 점심식사
오후시간 사무실에서 계속 근무
18시 구내식당
23시 30분까지 사무실에서 야근
23시 40분 관사 퇴근
화장실은 0층 좌측편 이용

위와 동선이 겹치는 직원이 있으면 총무과로 신고 바랍니다.


불쌍한 검사님.

8시 출근. 12시 퇴근. 출근 후 해당층을 한 번도 벗어나지 않음. 

밤새 일을 하려고, 밤새 공부한 사람이 검사님이 되는 것인가. 그날따라 점심도 혼자 사무실에서 라면을 드셨다고 한다. 밤새 공부한 사람이 결국 밤새 일을 하는 것이다.


동선 공개 쪽지를 보며 불현듯 겸손해지는 나의 마음. 무엇인가를 저렇게 열심히 한 적이 있었던가. 

코로나로 뜻밖에 휴식시간을 얻은 검사님은 며칠 뒤 출근해서 위 동선대로 사무실 자가격리를 계속하셨다. 물론 자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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