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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선영 Aug 10. 2020

전산실 실무관의 일일

사건 입력을 합니다.


  입사하고 첫 공식 인사이동 때, 나는 사건계 전산실로 배치받았다. 흔히 전산실이라고 하면 컴퓨터 기기가 거대한 방에서 프로그램을 관대하게 다를 것 같지만, 뼛속까지 문과인 내가, 선생님만 10년을 하던 나에게 최첨단의 정보통신 따위를 시킬 리가 없다.

  검찰청의 전산실은 전산“관리”실이 아닌 전산“입력”실이라고 보면 된다. 경찰이나, 민원실 등에서 사건 기록을 가지고 오면, 수사관님이 우리 청 사건번호를 도장으로 찍어준다. 그렇게 사건번호가 찍힌 기록을 사건관리 프로그램에 등록하는 역할이 바로 전산실이다. 한마디로 검찰청에 오는 사건기록의 초기 관문이 나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필수로 확인해야 할 사항은 기존에 입력된 인적사항의 확인이다. 이름이나 주민번호에 오타를 내지는 않았는지, 휴대폰 번호는 누락되지 않았는지, 주소는 맞는지, 죄명과 기소의견은 일치한 지 등을 확인한다.

  그렇게 확인 후 <수리> 버튼을 누르면 우리청 번호가 등록되고, 그것이 사건번호 바로 <형제 번호>가 되며,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의미 있는 존재가 된 꽃처럼, 번호를 부여받고, 처리 가능한 사건이 된다. 


  하나의 사건에 번호가 부여되는 건 엄청나게 의미 있는 일이지만, 쉽게 비유하면 인터넷 회원가입절차와 비슷한 일이다. 세상 이런 성가시고 단순한 노가다가 없다.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다. 인공지능으로 무장한 4차 산업 혁명시대에, 자율주행차가 누비고, AI 이세돌도 이겨버리는 이 시대에, 왜 의미 없는 일련의 번호를 “응답하라 1994”처럼 수기로 입력하고 있는가. 고소인의 아파트 주소에 있는 오타를 발견하기 위해 내가 국어교육의 석사까지 마치고 10년 동안 선생님을 한 것이란 말인가. 

  물론 1년쯤 있다 보니, 아무리 자동으로 가능하다 하더라도 확인은 수시로 사람이 해야 한다는 것과, 모든 것이 완벽하게 자동으로 처리된다면 또 하나의 일자리가 없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기는 했지만, 단순 노가다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최대한 사건의 당일 접수를 위해 전산실은 늘 시간에 쪼들릴 수밖에 없다. 10시부터 나에게 입력해야 할 기록이 오기 시작하는데,  3시까지 마무리 지으려면 주어진 시간은 5시간. 여기서 점심시간 1시간을 빼고, 긴급한 사건 먼저 처리하는 1시간을 빼면 대략 주어진 시간 3시간이다. 조금이라도 입력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커피나 마실 물 등은 출근하자마자 세팅을 해놓고, 모닝똥도 마쳐 둔다. 오후 2시 나른해질까 봐 점심도 배부르게 먹지 않는다. 공장의 조립라인처럼 일정해야 하고, 불량 없이 정확해야 한다. 내가 정확한 정보를 확인을 해야, 검사실에서 수정할 작업이 줄어들어 일이 조금이라도 수월해진다. 아무튼 이런 집중력으로 임용고시를 준비했으면 진작에 선생님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구속사건이나 급한 사건은 접수 즉시 처리하는데, 독촉 전화가 오기도 하는데, 그럼 중국집 단골 멘트.

“네네. 지금 다됐습니다.”

  보통 이렇게 배당을 보낸 오후 3시가 되면 실무관은 영혼은 사무실에 두고 육신만 화장실로 걸어 다니는 경우가 많다. 인공눈물은 이미 1통을 다 썼을 시간이다. 물론 3시 이후에도 잡다하게 정리 정돈할 일은 많다. 


  이렇게 1년을 일을 하고, 나의 어깨가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느낌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전산실에도 봄도 있고, 꿀도 있다. 그건 바로 언제나 가능한 칼퇴다. 정해진 근무시간에 어깨와 손가락과 영혼을 컴퓨터에 갈아 넣고, 칼퇴를 하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상대적으로 전산실 실무관이 검사실 실무관에 비해 꿀자리라는 소문도 있다. 그러나 사람마다 느끼는 바는 모두 다 다른 것.


이곳에 오고 뜻하지 않게 주식을 포기하게 되어 장기투자자가 되어가고 있다. 근무시간에 주식을 볼 여유는 고사하고, 소개팅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근무시간만 되면 카톡 잠수를 탈 수밖에 없었다.


아, 내일도 빚쟁이처럼 시간에 쪼들릴 전국의 전산실 실무관님들이여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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