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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Jun 26. 2023

To. 시선

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를 읽고

  <시선으로부터,>라는 소설의 제목을 생각해 본다. 제목 끝에 붙어 있는 쉼표에 대해 생각해 본다. 시선으로부터라고 말하고 한 번 가볍게 쉬게 된다. 남들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 작게 한숨을 쉬어본다. 남들의 시선으로부터 숨어 조금 쉬어본다. 시선으로부터 온 편지를 읽으며 잠시 쉬게 된다. 아, 그러고 보니 마침표, 물음표, 느낌표가 아닌 쉼표이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잠시 쉬고 이야기는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제사상에 올리는 많은 음식을 만들었을 여인들을 생각해 본다. 조상을 위해 올리는 음식들. 그러나 그 조상은 그 여인들의 조상이 아니다. 그네들은 몸을 움직여 정성껏 음식을 만들고 제사가 시작되면 뒷방에 옹종그려 몸을 숨긴다. 음식을 만드는 그녀들, 제사를 지내는 그들은 제사의 대상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을까. 윗대, 윗윗대를 넘은 그 윗윗윗대 이상이면 제사의 대상이 되는 조상의 이름 외에 그들이 알고 있는 에피소드 같은 것이 있을까.     


  이제 하와이에서 심시선의 10주기 제사가 시작된다. 심시선의 조각을 이어 받은 후손들은 자신만의 제수를 찾아 하와이를 돌아다닌다. 하와이는 심시선의 예술적 뿌리가 탄생한 곳이므로 사실은 그녀를 추도하기 가장 적합한 곳이다. 그녀의 영혼은 헤매지 않고 쉽게 하와이를 찾아올 수 있을 것이다. 하와이는 제사를 위한 파격적인 장소가 아니다. 제사의 본래 의미, 오직 그녀를 기리기 위한 적확한 장소이다.      


  하와이를 돌아다니며, 그들은 너른 시선으로 시선과의 추억을 생각한다. 걷는 걸음, 추는 춤, 파도 속에서, 또는 깊은 잠에서 그들은 엄마, 할머니, 장모님의 기억을 되새긴다.  

    

  내가 이들의 여행을 지켜보며 느낀 첫 느낌은 ‘샘이 난다.’였다. 심시선을 비롯한 그녀의 조각들은 모두 빛나는 재능과 기세를 가졌다. 심시선이 어떤 인생의 여정을 겪어냈는지 알지만 여전히 그녀가 가진 기세와 재능은 내게 부러움의 대상이다.


  그리고 또 한 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든다. 심시선 정도의 사람이어야, 심시선 정도의 인생이어야 십 년 후에도 기억되고, 자손 모두가 며칠간 그녀의 삶을 되새길 수 있겠구나. 이런 생각은 아마 작가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생각일 수도 있다. 그래도 나는 앞서 말한 제수음식을 만들었던 여인들을 생각해 보게 된다. 굳이 이분법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나는 심시선에 가까운 여자가 아니라 조용히 음식을 만드는 여자에 가까울 것이다. 앞 문단에서 말한 심시선에 대한 질투로 인해 이런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런 그림자같은 여인들도 십 년 후에 자식들이 모여 심시선을 기리듯 그려줬으면, 기억해줬으면.


  시선의 조각들인 그녀의 자손들은 각자의 인생과 현재의 고민으로 오늘을 살아간다. 그들은 심시선이 하와이를 떠나지 않았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사람들이다. 그들은 심시선이 고통을 겪고 나서야 생긴 사람들이다.      

  화수는 긴 잠 끝에 너무나 맛있는 팬케이크를 먹는다. 명혜는 긴 인생을 되돌아보며 훌라 춤에 깃든 의미를 알아차린다. 우윤은 자신을 휘감는 파도의 물결 속에서 바다의 힘, 모험과 죽음의 힘을 느낀다. 


  이제 추억으로만 존재하는 시선의 캐릭터는 명쾌하다. 등장인물 중 누구보다 뚜렷한 인물이다. 그리고 그 인물은 각각의 등장인물 모두와 십 년 후에도 되새길 수 있는 추억을 가지고 있다. 아, 그녀에게 느끼는 나의 질투. 나는 어쩜 그녀가 가진 재능과 기세 보다 그녀가 가족들 모두에게 준 추억과 기억을 더 부러워하는지도 모르겠다. 제사에 참여하는 모든 가족은 심시선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사랑한다. 심시선은 전통적인 방식의 어머니는 아니었지만 장녀 명혜는 그런 엄마와 자신의 가계에 대한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나는 심시선처럼 가족에게, 또 누군가에게 그렇게 진한 선으로 기억될 수 있을까.     


할머니는 강렬한 인물보편적이지 않은 인물이었다성격상 쉽게 분쟁에 휘말리는 편이었고그럼에도 자기 의견을 좀처럼 굽히지 않았으며대중의 가벼운 사랑과 소수의 집요한 미움을 동시에 받았다쉽사리 희미해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보통은 며느리가 뭘 하고 사는지 그렇게까지 궁금해하지 않잖아그런데 어머님은 정말로 내가 뭘 하고 지내는지 궁금해했어무슨 책을 읽는지어떤 내용인지나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그 시대 여자들은 다른 여자가 귀엽다 싶으면 김치를 보냈다고김장철엔 각지의 김치가 왔다까.

      

다른 삶을 원하는 얼굴자기 삶을 계획하는 얼굴가진 것 없이 비극에서 시작해도 뭔가를 이루고 말 얼굴이었다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세상을 뜬 지 십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여자들은 귀여운 여자에게 김치를 주고 싶다는 말이 정말 귀엽다. 김치를 주고 싶은 여자라. 심시선에게 주는 여자들의 사랑과 조용한 지지는 그렇게 전국에서 오는 그네들 각자의 자부심이 가득한 김치로 전해진 것이겠지. 김치를 직접 담그는 여자들은 아마도 시선과 같은 느낌의 삶을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음식을 자신의 손으로 해먹는 그녀들은 심시선을 많이 미워했고, 좋아했고, 귀여워했다. 그러니까 심시선은 여자들이 좋아하는 사람. 조금 앞선 사람. 세기말이 아니라 21세기가 원하는 사람이리라.     


  또한 심시선은 이름처럼 자신만의 깊은 시선을 가졌다. 사람들의 허다한 시선으로부터도 자유로웠다. 그 자유로움은 방종이나 이기가 아니었다. 자신만의 시선을 가진 그녀는 자신만의 기준을 가지고 삶을 살아갔다. 그 시선은 피붙이의 학살, 마티아스의 잔혹함 속에서도 빛났고 오히려 더 벼려졌다.


  그녀의 후손들은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그렇다. 화수는 회복할 것이다. 화수는 긴 잠에서 깨어 팬케이크를 잔뜩 먹고 또렷해진 사람으로 세상에 나갈 것이다. 그리고 아마 상헌과도 계속 살아가지 않을까. 애잔한 남자들만이 이 가계에 존재하니까 말이다. 화수는 지금껏 정도의 길로 살았다. 편안하고 안온했지만 어쩜 그건 심시선의 가계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화수는 이제 정도의 길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회복되고, 다시 웃을 것이다.       


  그리고 지수는 행복할 것이다. 지수는 내가 이 작품에서 좋아하는 캐릭터이다. 지수가 우윤을 살리고, 화수를 위한 완충재가 되어주는 부분이 좋다. 화수가 정도의 삶을 살 때 지수는 샛길로 가고, 또 발을 헛디는 것처럼 산다. 그런데 가족 모두는 그런 지수의 삶을 아무도 걱정하지 않는다. 모두 알고 있다. 지수에게는 내면 속에 자신만의 곧은 심지와 바름이 있다는 것을. 그것이 지수가 자신만의 정도를 걷게 함을 모두 알고 있다.     


  “끝나겠구나, 이 아름다운 가계가.” 명혜의 이 예언은 틀렸다. 경아가 애초에 시선이 낳은 딸이 아님에도 시선 본인을 비롯해, 다른 형제들, 경아까지 아무도 그녀가 시선의 딸임을 의심치 않았듯이. 애초에 핏줄을 신경 썼을 심시선이 아니다. 이제 시선이 뿌려놓은 많은 글들, 많은 말들은 작은 조각이 되어 세상의 작은 씨앗이 될 것이다. 심시선의 가계는 계속 된다. 기세좋게, 기가 세게.      


  이제 제사상에는 정종 대신 파도의 거품과 커피가, 병풍 대신 무지개 사진이, 전 대신 팬케이크가, 약과 대신 말라사다 도너츠가 놓인다. 거기에 화산석 자갈과 깃털 컬렉션이라니. 절 대신 하와이의 전통 춤이라니.   
  

  제사상에 온 시선은 깔깔 웃으리라. 그리고 그들의 뺨에 뽀뽀할 것이다. 가볍게, 건조한 입술로.      


  “From. 시선”의 긴 편지를 읽었다. 이 글은 “To. 시선”으로 시작하는 나의 작은 편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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