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지근하다-고기 따위를 끓인 국물이 깊은 맛이 있다
제주를 여행하며, 제주에 살며 가장 많이 접하는 음식은 '고기 국수' 다. 제주도에는 어디에 가나 국숫집(육지도시의 커피숍이 그러하듯)이 있다. 관광객이라면 제주 3대 고기국숫집이라 불리는 곳에 가야 고기국수의 진수를 맛볼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제주도민의 국수사랑은 대단하고 전반적으로 국수요리에 대한 수준이 높아 어디 가나 맛있다. 또한 맛있는 돼지고기가 있지 않은가. 이름, 유명 여부에 관계없이 고기국수는 맛있다. 그래도 그중 동네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국숫집이 있기 마련이니, 지나가다 가게 안에 삼춘들이(삼촌아니다, 삼춘이다. 제주에서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연장자를 '삼춘'이라 부른다. ) 사랑방처럼 모여있는 곳이 그 동네 국수맛집이다.
제주 고기국수의 시작은 일제 강점기인 1910년대로 보고 있다. 그때 건면이 제주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거친 메밀면(메밀면은 찰기가 떨어진다)만 먹다가 부드러운 밀가루 건면을 맛본 것은 대단한 매력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잔칫날이면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해 준비한 돼지고기 삶은 국물에 국수를 함께 낸 고기국수가 자연스럽게 대중적인 음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그렇게 어느새 100년의 역사를 가지게 되었으니 이제 제주향토음식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다.
돼지고기를 삶은 국물이라니 느끼하거나 돼지고기의 잡내가 날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그 국물맛을 부산의 돼지국밥, 일본의 돈고츠 라멘과 비교하고는 하는데 개인적인 내 입맛으로는 제주의 고기국수 국물이 훨씬 담백하고 뒷맛이 깔끔하다. 후추, 고춧가루, 소금 등이 들어가는데, 처음 국물은 아무것도 넣지 않은 채 맛을 보고 개인적인 선호에 따라 나머지 향신재료를 추가할 것을 권한다. 굳이 안 넣어도 그 순수한 국물맛 만으로도 맛있다. 제주도의 많은 국수들은 특별한 표기가 없는 한 대부분 중면이다. 중면은 세면 <소면 <중면의 면굵기에 따른 분류인데, 육지부의 잔치국수에 쓰이는 국수는 소면이다. 그보다 조금 더 굵은 국수라고 생각하면 된다. 아무 정보 없이 국수를 받았을 때, 면이 굵기에 불어 나온 줄 알고 깜짝 놀랐다. 이것은 소면보다 굵은 중면이고, 면이 굵어서인지 먹으면 훨씬 제대로 한 끼 먹은 것 같은 포만감을 준다. 대부분 곱빼기는 1천 원 추가이지만, 기본국수를 주문해도 주는 양이 넉넉해서 아쉽지 않다. 곱빼기로 주문하기는 조금 미루고 비빔국수나 멸치국수 등을 시켜보는 것도 별미를 맛볼 기회가 된다.
국숫집의 밑반찬은 무얼 줄까. 가게마다 계절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된장에 찍어먹을 청양고추(풋고추처럼 생겼지만 맵싸하다), 생양파 썬 것, 양파간장장아찌(새콤달콤한 맛), 깍두기, 계절에 따라 배추김치 혹은 열무김치 등이 나온다. 국수가 맛있으므로 김치 등으로 입맛을 돋우지 않는다. 육지스타일로 칼국수집에 딸려 나오는 겉절이를 보기는 어렵다.
고기국수를 먹으며 얹어준 고명의 돼지고기가 맛있어 더 먹고 싶다면 돔베고기를 주문하면 된다. 제주에서는 육지의 편육처럼 고기를 삶아 누르지 않고, 뜨거울 때 도마에서 썰어 먹는다. '돔베'는 주방에서 쓰는 도마의 제주어이다. 그러니까 돔베고기는 도마고기, 즉 도마 위에서 썰어 먹는 삶은 돼지고기이다. 고기국수를 먹다가 깔끔하고 깊이 있는 국물맛이 좋았다면 모자반을 넣어 끓인 제주 몸국을 먹어보자. 몸국은 대소사를 치르기 위해 돼지를 잡을 때(추렴한다고 표현한다) 큰 가마솥에 돼지고기를 끓이고 그 국물에 해조류인 모자반을 넣어 넉넉하게 나눠 먹었던 행사음식이다. 국물은 고기만 넣고 끓이는 것이 아니라, 고기와 뼈 그리고 돼지내장까지 한 솥에 넣고 끓이니 배지 근한 그 맛은 돼지의 모든 부위를 넣고 끓이는데서 나온다.
추운 겨울, 따뜻한 고기국수 한 그릇이면 배 속이 든든해지고 온몸이 따뜻해진다. 그러나 한여름 에어컨 아래에서 먹는 뜨거운 고기국수도 맛있다. 봄에도 가을에도 맛있다. 그러니 고기국수는 사계절 언제 먹어도 맛있다. 맛있는 국물, 넉넉하게 얹어준 삶은 돼지고기는 따로 안주 없이 고기국수 한 그릇만으로도 제주막걸리, 한라산 소주를 부른다. 베지근하다~ (베지근하다는 고기 따위를 끓인 국물 등이 깊은 맛이 있다는 뜻. 제주어사전에서)
사진: 제주대 교수회관의 고기국수. 학교에서는 반찬으로 콩나물무침, 깍두기, 양파장아찌(이 반찬은 제주도의 대부분 식당에서 밑반찬으로 나온다), 그리고 생양파썬것(중국집이 아닌데)과 쌈장을 준다. 맛있다. 6500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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