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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실은 잘 지내지 못해요 새로운 일의 여파가 대단해요

Dear.  잘 지내는지요. 누군가가 추석에 소원을 빌었다죠. 그러면서 달라진 자신을 깨달았다죠. 예전에는 ~되게 해 주세요. ~이 이루어지게 해 주세요였는데 요즘은 그냥 잘 지내게 해주세요래요. 공감했어요. 별일 없이 안녕하다는 말이 얼마나 대단한 말인지. 일을 계속해나가게 하는 것을 이야기를 했네요. 저는 '밥'이 중요해요. 안정적인 가정식 백반 같은. 제가 출근하는 곳은 제주교대예요. 학교에서 예산을 따서 그것으로 사업을 하는 거, 거기에서 행정일을 해요. 학교라 학식을 먹어요. 좋아요. 다만 학교의 규모가 작아서 저녁밥은 안 해요. 작은 고등학교만 해요. 대학 캠퍼스의 낭만 같은 거 없어요. 애들도 교대 애들이라 이마에 '성실, '나 착함'이 써붙여져 있는 느낌. 제가 다니는 대학원도 이곳에 있어요. 학위를 따면 아마 사회교육학일 거예요. 익숙한 건물, 뻔한 가게, 아는 도서관, 아는 동네 풍경. 이미 지난 2년 동안 헤맨 곳. 퇴근하고 옆교실로 등교합니다.(그런데 가끔 지각을 합니다)


 이사를 했다고 했죠. 제주도는 생각보다 넓습니다. 서귀포에서 제주대 아라캠(제주대)까지는 한 시간, 그래도 다닐만해요.

그런데 제주교대까지는 1시간 반, 버스로 1번 환승하면 2시간을 잡아야 해요. 서귀포를 좋아하지만 여러 가지로 맞지 않아 제주시, 그것도 직장 바로 옆(버스로 2 정거장, 1.5킬로미터 거리)으로 이사를 했어요. 걸어 다녀요. 20분 걸려요. 회사는 일도, 단장님(교수님이시죠)도, 주변 조교들도 좋아요. 막 대하는 사람 없고 존중하고 존중받고 인격적으로 대접받는 소중한 느낌이요. 내가 살면서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떼거지로 만난 적이 있나 싶어요. 제주도 그리고 대학원 진학. 이건 저에겐 정말 좋은 기회들이 주어지는 마법 같은 일의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202*년 11월이에요. 이때쯤이면 우리는 또 세월의 빠름과 무상함을 느끼죠. 달력을 보냈죠. 올해가 맘에 안 들면 달력이라도 얼른 갈아타라고. 그리고 202*년을 멋지게 보낼 희망을 가지라고.


 저는 실은 잘 지내지 못해요. 새로운 일의 시작이 주는 여파가 대단해요. 설레기보다는 무능력과 부족함을 많이 느껴요. 두 달이라면 짧으니 뭐 할 말이 있겠냐마는 기간이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일의 여부와 상관없이 한 일에서 오래 그 일을 계속해나가고 있는 사람들 정말 존경해요. 그렇다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을 경시하는 건 아니고 그건 그거고. 

 우리가 갖게 된 또 하나의 공통점, 월급 받는 사람. 그리고 월급 받는다고 매여있으니 시간 없음....


 학교에서 예산을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서류에 서류를 필요로 해요. 공문을 쓰고 서류를 하고... 거저 돈을 주지 않아요. 그동안 얼마나 편하게 살아왔는지  실감해요. 시간이 없고 피곤해서 아무것도 더는 하고 싶지 않은 무력감에 공부를 못하고 있어요. 대학원 수업 하나 듣는데 미리 올려주시는 '읽을거리'를  못 읽고 가는 날이 비일비재. 그런 일상이에요.


 혼자 지내는 것은 좋고, 제주에 뼈를 묻고 싶다 했는데 생각이 조금 바뀌어서 10년만 지낼까 싶어요. 7년 남았어요. 집을 한 채 장만하려던 계획을 접고 연세를 얻었어요. 500에 500. 조삼모사예요. 한 달에 한 번 돈 나가면 그렇게도 크게 느껴지고 아깝더니 한꺼번에 내고 들어와 공짜로 지내는 느낌. 집 떠나 공부한다고 등록금 내, 집 없으니 집세 내, 밥 사 먹어.... 세상에 이런 사치가 없어요. 호사예요.


*저장된 1년 지난 글을 발굴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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