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서재 정리를 하다가 오래된 서랍 하나를 열었다. 먼지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노트 한 권이 고개를 내밀었다. 2021년 3월, 마지막으로 손으로 쓴 일기장이었다. 삐뚤빼뚤한 글씨체, 이곳저곳 번진 잉크 자국, 급하게 적다 만 문장의 끄트머리... 지금은 모두 과거가 되어버린 것들이다.
생각해보면 언제부터였을까. 키보드를 두드리고, 음성으로 메모하고, AI에게 글을 부탁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진 것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니 그 변화는 서서히, 그러나 매우 분명하게 찾아왔다. 처음에는 편리함에 이끌려, 그다음에는 효율을 좇아, 마지막에는 습관이 되어 손글씨는 어느새 나의 일상에서 사라져갔다.
어머니는 여전히 장보기 목록을 손으로 쓰신다. 언젠가 휴대폰 메모장을 권했더니 "그래도 손으로 써야 기억에 남지"라고 하셨다. 그때는 고집스럽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 말씀의 의미를 알 것도 같다. 손글씨에는 그 순간의 감정이, 시간이, 그리고 그날의 온도가 고스란히 담기니 말이다.
묘하다. AI가 완벽한 문장을 만들어내는 시대가 되었지만, 우리는 오히려 불완전한 손글씨가 주는 따뜻함을 더욱 그리워하게 되었다. 삐뚤빼뚤한 글씨에 담긴 우리의 마음, 번진 잉크에 스며든 그날의 감정, 구겨진 종이에 새겨진 시간의 흔적... 그것들은 어떤 AI도 만들어낼 수 없는, 오직 우리만의 이야기다.
서랍 속 일기장을 다시 꺼내본다. 페이지를 넘기자 희미한 잉크 향이 코끝을 스친다. 그렇게 오래된 기억 하나가 내 마음 한켠을 적신다. 오늘 밤, 펜을 들어 글을 쓰기로 한다. 비록 느리고 서툴지만, 나만의 이야기를 손글씨로 남겨보려 한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AI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작은 행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