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석이 대학 합격장을 들고 나타났다. 공부를 시작한 지 고작 두 달 만의 수능을 치르고 벌어진 일이었다. 경기도에 있는 작은 2년제 대학이었다.
지난 주에 엄청난 꿈을 꿨어. 수미 씨가 이만큼 큰 구렁이를 안고 있길래 내가 구해주려고 달려가서 보니까 그게 구렁이가 아니더라고, 다리가 달려 있었어. 몸통은 아주 사람 허리만 해가지고, 그게 얼마나 큰지 당신 얼굴이 힘들어서 땀을 뚝뚝 흘리고 있기에 내가 당신을 도와주려고 했는데, 글쎄 수미 씨가 울면서 안 된다구, 자기 거라고 그러지 뭐야. 그게 비늘이 알록달록하니 예쁘기는 했지만 나는 자기 고생하는 게 싫어서 그걸 가지구 옥신각신하다가 깼는데 그 큰 도마뱀 꿈이 바로 길몽이었나 봐.
모처럼 젊은이들이 많이 모인다는 멋진 다방에서 만나자 하기에 잉태 사실을 고백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수미는 헌석의 합격장을 들고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 대학이라면 당연히 서울의 그럴싸한 곳에 지원할 줄로 알았는데, 놀랍게도 헌석은 제 분수를 영 모르지 않았다. 당연히 따라야 할 불합격을 위로하려 했던 수미는 그만 좌절하고 말았다. 헌석은 그런 수미의 두 손을 제 양 손으로 감싸쥐고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수미 씨, 우리 이제 고생 다 했어, 행복 시작이야. 수미는 네 개의 손에 얼굴을 묻고 계속해서 흐느꼈다. 그 마음을 모르기 어려울 만큼 서러운 눈물을 세상에서 오직 헌석만 몰랐다. 그렇게 기쁘냐며 묻는 그이의 손을 뿌리치고 수미는 도망쳤다.
수미는 그 다음 날, 공장에 사직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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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까지만 일하고 싶습니다.
눈가가 시뻘개져서는 하는 말에 공장장은 허둥지둥하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사직서를 받아들었다.
장헌석이랑 헤어진 거야? 그놈아가 그만 두었는데, 수미 씨는 그냥 다니지 그래.
수미는 헌석에 대한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이미 밤새 실컷 쏟아낸 눈물을 더 뽑을 기운이 없어 코로 깊게 숨을 내쉰 후 배시시 웃었다.
인천의 친척 집에 의탁하려고요.
덧붙인 수미의 말에 공장장은 얼굴이 약간 풀어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서도 잘 지내고.
수미는 다시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고개를 푹 수그렸다. 죄인처럼 손을 모으고 우두커니 선 채 눈물을 꾹꾹 눌러 담는 수미를, 공장장은 깊은 숨을 내쉬고 어깨를 두어 번 도닥여주었다. 괜찮다, 수미야. 공장장에서 다시 아버지의 친구가 되어 건네주는 그 말에 수미는 졸음처럼 참을 수 없이 밀려오는 설움을 기어코 이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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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부탁해. 응? 우리 아들은 장인장모 사랑 받을 집으로 보내고 싶어서 그래, 응?자식이 잘못된 길을 가는 걸 그냥 두고 보면 그거 부모 아니잖어, 어어? 아니, 아가씨가 잘못된 길이라는 건 아니구..., 아무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아가씨는 젊으니까 다른 남자 만날 수 있잖어, 응?
헌석이 합격장을 받기 일주일 전, 어찌나 간절한지 이 밤에, 어찌 알고, 제 집 앞까지 찾아와 애절하게도 부탁을 하는 헌석 어머니 되는 이의 눈을 수미는 멀건히 쳐다보았다. 헌석은 어머니를 닮은 것 같다. 그렁그렁하고 둥그런 눈망울이 특히나 헌석을 꼭 닮아있어 마치 헌석처럼 제 두 손을 꼭 모아 잡는 주름진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이런 순간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런 순간이 오면 당당하게 싫다, 나는 장헌석 씨와 결혼할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우리는 남들이 아무리 무어라 해도 서로를 깊이 그리고 뜨겁게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려고 늘 준비해왔다. 그의 아이를 가졌다고, 그가 대학생 딱지를 달게 된 것에는 내 공도 있지 않느냐고, 그는 내 인생을 책임져 마땅하다고 당당히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간절한 눈을 마주하고 나니 말문이 목구멍에 턱하니 막혀 나오질 않았다. 뜨끈하게 전해져 오는 손의 온기에 숨이 막혀 질식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 눈을 피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아마 헌석의 어머니가 보고 있는 제 눈은 죽은 지 일주일이 된 고등어 눈깔이리라. 그러고 나니 힘이 빠졌다. 수미는 가까스로 시선을 떨구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고마워, 아가씨. 아가씨도..., 아가씨도 좋은 사람 만날 거야. 우리 아들 말고.......
오로지 마지막 여섯 자만이 진심이었을 말에 대고서 수미는 두 손을 배 위에 모으고 허리를 푹 수그려 깊이 인사했다. 연신 고맙다는 말을 내뱉는 눈망울이 고운 늙은 이가 저 멀리로 멀어져 끝내는 보이지 않을 때까지, 수미는 허리를 펴지 않고 배를 끌어안고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