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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지현 Aug 30. 2023

도마뱀, 09

여덟 겹

  연인과 심하게 다투었다. 스무 살 때부터 군생활 기간과 취업 준비 기간에 더해 약간의 결혼 자금을 모은 기간까지 합쳐 꼬박 12년을 연애한 끝에 결혼이라는 결실을 맺어 볼 참이었다. 스물여섯이 저물어 가던 어느 날 그녀가 말했듯 더 멋있게 연인에게 청혼하려 했건만, 혹 우리는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던가.





  십 개월 짜리 청년인턴으로 일했던 회사에 공채 합격했던 날, 나는 엄마보다 아버지보다도 애인에게 가장 먼저 전화를 걸었다. 으흐흐, 그럴 줄 알았어. 한결같은 그 웃음소리에 보답할 날도 머지않았다 생각했던 것은 정말, 정말 나 혼자만이 아니었을 텐데, 그랬을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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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업만 하면 결혼을 할 수 있을 줄로 생각한 것 역시 내가 언제나처럼 하던 착각으로, 대출을 내어 방 두 칸짜리 전셋집을 구하는 것조차 버거워 결혼은 서른 한 살을 넘겨서야 진행되었다. 연인은 처음으로 나를 부모님께 소개했다. 간혹 결혼을 재촉하면서도 은근슬쩍 눈치를 주었을 때도 부모님을 만나게 하는 것은 통 거절만 했던 그녀인 터라 한껏 부푼 마음으로 면접을 볼 때 입었던, 내가 가진 옷 중 가장 비싼 이십팔만 원짜리 정장을 입고 오만 원짜리 꽃다발을 샀다. 한 번도 눈길조차 준 일이 없던 백화점의 고급 과일 바구니를 구만구천 원을 주고 샀다. 바로 옆에 나란히 놓인 금빛 보자기에 싸인 한우 앞을 몇 번 서성이기는 했으나, 가격표를 보고 눈이 이리저리 굴러버려 감당하지 못하고 자리를 떴다.





  고층 아파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서 있다 냉큼 달려와 내 손의 짐을 나누어 드는 연인을 보니 더욱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앞으로는 퇴근하고 돌아오면 이렇게 그녀가 항상 나를 기다려 주겠지. 이것이 조만간의 우리의 미래일 것이라는 꿈에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흐흐흐, 안 헤매고 잘 왔네.




  싸늘해지기 시작한 날씨에 제법 오래 서서 나를 기다렸는지 얇은 카디건을 걸치고 있는 애인의 스치는 손끝이 차가웠다. 왼손에 녹빛 비단 보자기를 쥐고 오른손에 그 애의 손을 쥐었다. 내 손도 차가웠지만, 이대로 손을 쥐고 있다 보면 곧 따스해지곤 했다. 그것이 온기라는 것이니까. 차가운 두 손이 맞닿아도 둘 다 따뜻해질 수 있는 것이 온기니까, 우리는 이것으로 괜찮을 거라 생각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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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인의 부모님은 따스하고 다정한 분들이었다. 애인의 향그러운 웃음소리가 그 집에는 더 많이 살고 있었다. 여느 백년손님들이 그러하듯 나도 내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것보다 훨씬 어마어마한 밥상을 받았고, 취업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젊은이가 돈이 어디 있겠느냐며 허례허식은 생략해도 좋다는 응원을 받았다. 그것은 우리 부모님과도 같은 의견이었기 때문에 이제는 '다 된 일'인 줄로 알았던 그때, 바로 그때 우리 연애에 그만 첫 갈등이 시작되었다.





  나는 코팅팬 싫어! 스태인리스 팬으로 사야 오래 쓴다고!

  코팅팬은 이만 원이면 사잖아. 스탠 팬 하나 살 돈으로 열다섯 번은 교체할 수 있다니까? 쓰기도 훨씬 쉽고, 코팅팬을 사는 쪽이 훨씬 합리적이잖아!





  프라이팬, 그것이었다. 정말로 그것이었다. 둘 다 부모님께 의탁해 지내다 결혼하며 독립하는 터라 요리에 익숙하지 않으니 사용이 어렵다는 스태인리스 팬보다 코팅팬이 훨씬 좋을 텐데도 자꾸만 고집을 부리는 그녀가 답답했다. 정말로 가격 때문에만 반대하는 것이 아닌데 그녀는 내가 돈을 쓰는 것이 인색하다는 식으로 답답해했고, 나는 그녀가 대기업에 다니더니 씀씀이가 지나치다는 평을 내려서 그녀의 화를 돋웠다.

  우리는 주방용품점에서 아주 크게 싸웠다. 그녀와 알고 지내는 모든 시간 동안 그녀에게 이렇게 큰 소리를 내어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 또한 사람들 앞에서 그토록 크게 화를 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시작은 분명 프라이팬이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구 년 전 이야기들까지 그녀의 눈물을 타고 쏟아지고 있었다.





  우리 결혼, 다시 생각해.





  십이 년을 만나며 처음 들은 연인의 분에 어린 목소리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뒤돌아서는 애인의 긴 머리칼이 흐드러지며 익숙한 향을 훅 풍겼다. 이름을 부르며 붙잡으려 했는데 왜인지 그럴 수가 없었다. 그 애의 이름이, 낯설었다. 아니, 뒷모습이 낯설었다.

  내가 저 애의 뒷모습을 이렇게 지켜본 적이 있던가. 애인은 항상 나를 향해 마주보고 웃던 사람이었다. 그것이 너무 당연했기에 나는 그 애의 차가운, 어두운, 커다랗게 낯선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그 모습이 군중 속에 파묻혀 찾을 수 없을 때까지 그 자리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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