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다를 것 없던 오후, 아내가 급히 오후 휴가를 내고 아들의 학교에서 연락을 받아 담임 선생님을 만나서 가고 있다며 전화를 해 왔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아내가 한숨을 포옥 내쉬며 만나서 이야기하자 하기에 나도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오늘 목표한 만큼의 업무를 채우지 못했으나 당장은 그것을 생각해서는 안될 것 같아 부서장에게 보고 후 회사를 벗어났다. 탐탁지 않은 팀장의 표정이 대뇌 한 켠에 걸려들었으나 대충 덮어두었다. 아들의 학교가 어디더라, 여기에서 얼만큼 걸리더라....... 뇌가 일하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아내에게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나왔어?
응, 나왔어. 얼른 갈게.
xx중학교 2학년 2반이야.
아내는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아는 이답게 빠르게 정보를 제공했다. 네비게이션에 위치를 찍고 25분쯤 걸릴 거라 대답하고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귀 밑에서 심장이 둥 둥 울려 정신이 없다. 심각한 일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아들은 호락호락한 아이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유별나게 못된 아이도 아니었다. 순하고 어여쁘기만 했던 딸보다 까탈스러운 아이였지만서도 그렇다 해서 부모를 유별나게 괴롭힌 적도 없었으니 아마 이번에도 큰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애써 생각하면서도 떨리는 손을 가라앉히기 위해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나서 천천히 엑셀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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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아내가 등 뒤에 아이를 숨긴 듯 세워두고 한 여자에게 거듭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앞에서 사과를 받는 여자는 화가 나기보다는 난처한 표정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건대 아마도 아이의 담임 선생님이신 듯했다. 어찌되었건 죄인이라도 된 듯 굽신거리는 아내를 보고 있자니 속이 뜨거웠다.
여보!
아, 여보.......
이미 얼굴이며 눈가가 벌개져서 이마에 땀까지 송골송골 맺힌 아내가 나를 돌아보았다. 속에 담긴 뜨거운 것이 울컥 치솟아 나도 모르게 아들을 거칠게 잡아 당겼다. 아이가 잔뜩 움츠러들어 눈을 질끈 감는다. 여보, 안 돼! 아내의 비명 같은 소리에 내 등도 움츠러든다. 나도 모르는 새 내 손이 번쩍 하늘로 치솟아 있다. 아내의 외침이 없었다면 대번에 아들의 뺨을 내리쳤을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죄책감이 심장을 뒤덮었다.
아내가 내 팔을 붙잡아 끌어내렸다. 아버님, 진정하세요! 교사도 한 걸음 성큼 다가왔다. 팔에 닿은 아내의 차가운 손에 분노도 차갑게 식어내린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만 식어버린 분노를 어금니에 담아 꾹 눌렀다. 턱이 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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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내가 잘못도 없이 수십 번 고개를 숙이는 내내 아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사실이 더욱 괘씸해 몇 번이고 아들을 함부로 후려치고 욕설을 던지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아내가 더 큰 갈등을 감내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 분들을 목구멍 너머로 꾹꾹 눌러 삼켰다. 나의 분은 내가 삼켜야 옳다. 내가 아내의 울음을 대신 삼켜주지 못하는 것처럼, 아내도 나의 분을 대신 삼켜주지는 못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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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교내에서 흡연을 하다 적발되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을 들켜 훈계하다 한계를 느낀 선생님이 부모인 아내와 내게 알리게 된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 돌이켜 보면 참으로 별것 아닌 일이었다. 학창 시절 호기심에 나쁜 짓을 하게 되는 것은 많은 아이들이 겪는 일이 아니던가?물론 내 아들 승호의 경우 호기심이라기에는 그 횟수가 잦았으나, 부모의 마음이라는 게 으레 그렇듯 우리 아이의 현재 상태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니 내 아들의 실제 상태는 차치하고, 다른 이들이 겪었다면 한참 그럴 때지- 하고 넘길 수 있을 일이었을 텐데, 그럼에도 내 생에 이토록 충격적인 일은 또 없었던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심지어는 내가 무엇에 그토록 분노하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심지어는 이 분노가 대체 어떤 종류의 분노인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는 도마뱀이었다. 곤란함을 겪고 어려움을 겪고 상처를 받아도 껍질을 벗고 깨끗해질 수 있는 도마뱀. 꼬리를 잃어 외관은 다소 못날 수 있으나 어쨌든 탈피를 거듭할 수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기에 나는 이렇게 격렬한 감정의 격통을 겪어본 일이 별로 없었다.
길게 지나지 않아 나는 그 감정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배신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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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어린 아이에게 성체인 내가 배신감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못내 부끄러웠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이는 집에 들어서자 마자 제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이어서 철컥,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가 아비의 못난 감정을 눈치챈 듯하다. 그럴 리 없는데도 잠긴 문이 아이의 마음의 문 같아서, 그 문이 그만 잠겨버린 것 같아서 심장이 덜걱 내려앉는다.
그러나 미안함과는 별개로 나는 아직 커다란 배신감을 알처럼 명치에 품고 있었다. 심지어는 대화도 없이 문을 잠가버리는 아이를 향한 원망도 슬그머니 제 몫을 보탠다. 그날 밤, 나는 그 잠긴 문을 끝내 한 번도 두드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