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X년으로 살아야겠다
내 이야기를 들은 다른 친구는 ‘넌 지금 생각 정리가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이미 가망 없이 깨어진 관계로 끝났는데 더 무슨 생각의 정리가 필요한 거지.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루정도 곱씹어보니 좀 억울해졌다.
도저히 잘 극복이 안되는 걸 보니 난 생각보다 별로 미안하지도 잘못하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저 그 사람이 그것밖에 안 되는 그릇의 사람이었던 것을, 내가 너무 겁을 집어 먹고 위축되고 조아렸다.
나를 지키지 못한 거다.
돌이켜보면 사회초년생, 그리고 연애시절엔 난 좀 X년이었던것 같다.
무수한 사회생활과 다툼, 심지어 가스라이팅까지 겪으며 깎이고 둥글어져 어느 순간 내 모습이 아닌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 모습이 나아졌다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지만 글쎄, ‘나’는 아닌 것 같다.
내 사과가 그녀의 분함과 분노를 내가 풀어줄 수 없다면 그냥 내버려 두기로 한다.
나 역시 분하고 억울한 부분이 있으므로.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그냥 다시 X년으로 살아볼까 한다.
저쪽에서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나는 그냥 내 길을 간다.
뭐 하러 배려하고 뭐 하러 저자세여야 하지. 난 잘못이 없는 걸.
자꾸 나한테서 잘못을 찾으려고 하고 고치려 드니까 극복이 안된다.
모든 일을 나만 잘못 한건 아니잖아.
모든 일에는 양쪽에 다 잘못이 있다.
혼자 다 짊어질 필요는 없는 거야.
그냥 나도 화내고 나도 미워하면서 살면 어떤가.
물론 누군가를 향한 미움은 나에게도 피곤한 일이지만. 굳이 좋은 기억으로 포장하려 애쓰는 노력보단 나을 것 같다.
내 인생에서 지금은 증오의 대상이 된 그들에게서 받은 영향이 전혀 없지 않다는 게 못 견디게 분할 때가 있다.
제법 큰 도움을 받았던 적도 있고, 큰 결정을 내리는데 영향을 받은 적도 있다.
하지만 그것들만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아니다.
그 사람들이 뭐라고 했건 말건 주변에서 들려오는 말을 듣고 실천으로 옮겨 결과를 거둬낸 건 바로 나다.
내가 실현해내지 않았다면 그 사람들의 말은 그저 스쳐가는 개소리였을 뿐.
현실로 만들어낸 건 내 능력이고 나의 의지다.
무엇보다 내 인생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길 아래 있다.
그 사람들도 나도 아닌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갈 뿐이니 분해하지 말자.
나는 그저 열어주시는 길을 묵묵히 걸어 나갈 뿐이다.
지금처럼 힘든 시기도 때로는 즐거운 시기도 그저 온몸으로 맞아가면서 말이다.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다시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