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따로 징징대지도 않았는데 얼굴을 보자마자 의사 선생님이 '오늘 풀어버리시죠'라고 하셨다.
원래 모레 빼는 날인데 이게 무슨 일이람!
아예 실밥도 빼자고 하셔서 너무 설레는 마음으로 처치실 침대에 앉아 흘러나오는 음악에 다리를 대롱대롱 흔들었다.
온몸이 떨리는 서늘한 냉각치료와 냉찜질 물리치료를 받고 뻐근하지만 가뿐한 팔로 서점으로 향했다.
며칠 동안 집에 누워 꼼작 마라 요양을 하느라 우울했던 마음을 달래러 가려던 참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깁스탈출 기념 외출이 되어버렸다.
제일 좋아하는 서점에 가서 책을 골랐다.
몇 주 뒤에 갈 일본여행 책과, 이모티콘 만들기 책, 그리고 컬러링 북을 샀다.
한동안 자기 계발서에 꽂혀서 사모았는데, 그럴 때마다 취미나 힐링은 왠지 참아야 할 무언가처럼 느껴졌었다.
난 원래 자수도 좋아하고 그리기도 좋아하고, 아무튼 손으로 사부작거리는 거라면 뭐든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런 게 무용하다 느꼈던 걸까.
나 자신이 무얼 좋아했는지 들여다볼 새도 없이 어딘가로 마구 달려가도록 등을 떠밀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얼추 유명한 자기 계발서들을 한번 훑고 나니, 그저 마케팅으로 점철된 수많은 책들에 약간의 권태감이 느껴졌다.
이제 어느 정도 어떻게 해야 성장하는지 머리로는 알게 됐는데, 정작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게 뭐였는지 잊은 느낌이랄까.
그런 김에 오늘은 하고 싶었던 것, 사고 싶었던 것을 사 보기로 했다.
어렵고 복잡한 컬러링 북은 머리가 아플 것 같아 심플하고 귀여운 밑그림의 책을 골랐다.
집에 있는 색연필은 좀 저렴일 뿐 아니라, 아이가 가지고 놀아서 잃어버리거나 섞이기 일쑤였으므로, 아이에게 방해받지 않는 나만의 색연필도 사기로 한다.
오래간만에 호기롭게 화방에 갔는데 생각보다 색연필이 비싸서 고민이 좀 길어졌지만, 결국 36색을 집어 들었다.
집에 오자마자 벅벅 마음껏 색을 칠했다.
가이드 페이지도 신경 쓰지 않고, 어울리는 배합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손에 집히는 대로 마구마구 칠해봤다.
생각보다 종이가 색연필을 잘 먹진 않아서 조금 아쉽지만 나름 즐겁다. 하나 하고 덮으면 조금 있다 또 하고 싶고 그렇다.
딱히 어디 큰 쓸모는 없지만, 나를 몰입하게 하고 즐겁게 하는 것들.
이젠 직장이 없기에 조금 덜 애틋하지만, 역시 그런 것들에 몰입하는 시간이 좋다.
깁스는 풀었지만 수술 부위는 여전히 뻐근하고 팔도 잘 펴지지 않아 욱신거린다.
이번주까지는 일을 완전히 놓고 편하게 쉬며 이런 무용하고 하잘것없는 일들에 집중해볼까 한다.
돈은 되지만 시간을 빼앗을 것 같은 의뢰도 하나 거절했다.
돈이 벌리지 않으니 마음은 급하지만 이젠 안 하고 싫은 일은 안 하고 싶다는 오기 어린 마음이 더 강했달까..
돈이 되지 않아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이제는 정말로 해보려고 한다.
잘 될지 어떨지 장담은 못하지만, 가다 보면 또 길이 나오겠지.
힘내자. 나는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