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족과 떠난 유럽 배낭여행 -
전날 호텔 프런트에 부탁했던 모닝콜에 두 남자의 방문까지 더해져, 눈을 떠보니 am 7시였다. 장거리 비행에 앞서 목욕재계를 한 후, 체크인 시 미리 챙겨두었던 식권을 내밀고 들어간 호텔 내 식당 안은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북적였다. 손목의 시계는 여덟 시를 향해 바삐 달리고 있었다. 저들의 목적지는 어딜까? 상념에 빠진 나와는 달리 엄마는 자리 확보에 열을 올리셨고, 창가 쪽 자리는 이미 만석이라 아쉬움을 뒤로하고 엉덩이를 붙였다.
"최후의 만찬은 아니지만 한동안은 구경 못할 산해진미니 눈치 보지 말고, 소화제의 힘을 빌리지 않을 만큼 드시지요. 그러고 보니 오늘은 5월 8일 어버이날이네요. 효녀 딸을 두셨네요. 그렇죠."
생색 한번 제대로 내고 와구와구 먹어댔다. 일식, 중식, 양식, 그리고 국적 미상의 요리와 갖가지 빵과 음료 그리고 과일까지,, 과연 몇 접시나 비웠을까?? 호사스러운 조찬이었다. 호텔 조식 뷔페에 웬 호들갑이냐 할 테지만, 전쟁을 앞둔 군인이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어딨는가!! 살기 위해, 그리고 버티기 위해서였다. 솔직히 말해 훌륭하기 이를 데 없던 것은 사실이었다. 식사 후 호텔 주변을 산책하던 중에 갑자기 두 남자가 종종걸음을 걷길래 따라가 보니 포르셰 자동차란다. 빨강의 강렬한 색과 군더더기 없는 자태는 봐줄 만했지만, 정작 차에 문외한인 나의 콧방귀 앞에서도 이태리 명차라며 굳이 기념사진을 찍어대는 것이 아닌가. 이에 심술궂은 마음이 비쭉 튀어나왔다. '유럽 가면 발에 차이는 게 명차이거늘, 촌스럽기는..'
호텔 프런트에 키 반납을 끝으로 공항행 셔틀버스에 올랐다. 일본-런던행 보딩패스와 고추장과 과도가 담긴 배낭도 부쳐야 했기에 JAL 데스크를 찾아 예약 메일을 내밀었다. 키보드 위에서 신나게 노닐던 그녀의 손동작이 뚝- 멈춘 것도 모자라 짐짓 당황한 표정으로 수화기를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고 있었다. '제 깜냥 해결할 수 없으니 전화를 하겠지' 생각이 여기에 미쳤으니, 이번에는 내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역력했겠지. 이를 직원이 보았을 테고, 지겹도록 익힌 응대 매뉴얼대로 급히 미소를 새기느라 다소 부자연스러운 표정이었으나 어쨌거나 전보다는 보기 편했다. 건넨 예약 메일을 내게로 물리며 그녀는 말했다.
"두 남자의 영국행 좌석이 더블 예약된 상태라, 이를 해결하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정작 배낭은 안중에도 없이 좌석 찾기에 혈안이 되었던 직원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새겨졌다. 처음 모습 그대로였다. 찾았구나!! '혹 떼러 왔다가 혹 붙인 격'이었다. 배낭 손잡이가 수하물 스티커를 두르는 것을 재차 확인하고서야 발길을 돌렸다. 탑승까지 남은 시간에 딱히 할 일도 없기에 상점들을 구경하던 중, 안마 의자를 발견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안마 의자와 한몸인 중년의 남자를 보았다는 것이 맞겠지. 세상 편해 보이는 그처럼 되고자 망설임 없이 의자에 앉았는데 진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갸우뚱하는 나를 보며 그는 동전 투입구를 가리켰다. 세상에 공짜는 없었고, 그는 친절한 사람이었다. 안부 겸 확인 겸 나를 살피는 그와 눈이 마주쳤고, 마치 안마 의자 모델이라도 되는 양, 연기를 하다가 곧추 세웠던 그의 관심이 꺾이자마자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만치 있는 출국 게이트보다 아빠의 모습이 더 먼저였다. 다급히 손짓을 하신 이유는 여권이 없어 게이트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가족 여행이다 보니 역할 분담은 꼭 필요했다. 엄마는 돈 관리와 식사를, 아빠와 오빠는 경호를, 여권과 유레일패스 그리고 가이드의 임무는 내 몫이었다.
늘 그렇듯, 비즈니스석을 시작으로 탑승 수속이 진행되었고, 지상에서의 마지막 배출 후 게이트로 돌아오던 중, 간이매점이 발을 붙들었다. 조금 전의 상황을 복기해 볼 때, 탑승까지 제법 여유로운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빈자리는 찾아볼 수가 없었고, 빼곡한 사람들 틈에서 오빠는 졸고 있었다. 조그만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잔뜩 몸을 구긴 채로 말이다. 차라리 안 보았더라면,, 그 모습이 눈에 밟혀 결국 프링글스 통을 손에 쥐었다. 눈을 질끈 감지 않았다면 어려웠을 일이다. 혹 금이라도 감춘 걸까? 가격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분명 쓸데없는 짓거리였지만 그럼에도 머릿속은 자꾸 계산기를 두드려댔다. 그러나 아이처럼 좋아하는 오빠를 보니 숫자 싸움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옆사람을 잘 만나야 하는 것이 화투와 비행의 공통점이 아닐까 한다. 첫 배낭여행 때 3-6-3의 6좌석 중 것도 딱 중간 자리였다. 밤 비행이었고, 화장실이 급했다. 나를 기준으로 왼쪽으로 외국인이, 오른쪽으로 동양인이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같은 피부색에게 호소하는 편이 나을 듯했다. 늙수그레한 그는 싫다는 한마디로 거절을 했고, 외국 남자는 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피부색만 같은 줄 알았더니 심지어 한국인이었다. 내 나라, 내 동포에게 당한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고, 당시의 충격은 한동안 머물렀다. 설령, 내가 단잠을 방해하여, 언짢았다손 치더라도,, 위법은 아니라 해도 그것은 분명, 매너 없는 행동이었다.
과체중이 아니기를, 고약한 냄새를 탑재한 이가 아니기를, 원하고 또 바랐다. 12시간이 넘는 비행이었기에 욕심이라 생각지 않았다. 늘씬한 아주머니가 자리에 앉자마자 수면 양말을 신는다. 깊은 잠을 청할 테니 방해하지 말라는 일종의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다행이었다. 두 번의 식사, 영화 감상, 창밖 구경에 쪽잠까지 더해진다면, 12시간은 물처럼 흐르리라. 창가 쪽 자리에 앉으신 엄마의 시선은 아까부터 쪽창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륙 전이라 둘러봐도 솜사탕 같은 뭉게구름 하나 없는데 말이다. 불편함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써 노력하는 몸사위였다. 이에 벌떡 일어나 이코노미석 내부를 휘돌아 보았다. 대부분 자리를 찾은 듯한 모양새라 순찰을 돌기에 적기인 셈, 비상 탈출구를 시작점으로 잡고 거슬러 올라가니 자리는 세 개, 사람은 둘이었다. 기다려 보았지만,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제 자리인 양 널브러져 있는 노트북을 보고, 혹시나 했던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나: 혹시 한국 분이세요?(한국인인 건 애진작에 알았다.)
남자들: 네.
나: 창가 쪽은 혹 빈자리인가요?(말투는 의문형, 감춘 속내는 당장 노트북을 치우라는 명령형이었다.)
남자들: 네.
나: 엄마가 연세가 있으셔서 좀 불편해하시는데, 자리 좀..(빼박 군필-노인, 여자, 아이는 지켜야지.)
남자들: 물론이죠.
내 말끝을 채며 그들은 서둘러 노트북을 옮겼다. 서둘러 기쁜 소식을 전했지만 정작 엄마는 망설이셨고 그러나 떠밀다시피 하는 나를 이길 수 없어, 결국 자리를 옮기셨다. 제 어머니 같은 내 엄마를 보자 그들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새겨졌다. 거듭되는 우리의 감사 인사에 되레 그들이 멋쩍어하길래, 서둘러 자리로 돌아왔다. 엄마가 떠난 빈자리는 내 차지였고,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최적의 조건을 위해 열을 올렸다. 이코노미석이 어련하겠냐만, 적어도 두 다리를 쭉 뻗는 호사로움은 누릴 수 있었다.
<겨울 나그네>를 보며 자전거 만남을 꿈꿨고, <비포 더 선라이즈>를 보며 기차 여행을 상상했다. 뜻하지 않는 만남 그리고 사랑,, 여행은 이 모두를 대놓고 기대하게끔 한다. 돌린 시선에 어느새 잠이 든 옆 자리의 아주머니가 들어와 피식- 웃음이 났다.
<백만장자의 첫사랑>이란 영화였다. 영화는 그 밥에 그 나물이었고, 선택의 이유는 간단명료했다. 잘생긴 남자, 예쁜 여자가 나오는 지극히 동화적인 내용이었다. 공중에 붕 뜬 채로 칼과, 총과 피가 낭자한 영화를 보기란 적잖은 용기가 필요했고, 촘촘한 그물을 스스로 걷어야 하는 서스펜스 스릴러에 굳이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나름 굴린 잔머리를 비웃듯, 감독의 의도와는 달리 영화는 허탈감만 안겼다. 백만장자를 만나기도 어렵지만, 현빈 같은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일은 현실에서 절대 일어나지 않을 테니..
비행기 안을 가득 채웠던 음식 냄새가 희미해졌고, 쓰러져 있던 머리들이 하나 둘 제자리를 찾았다. 승무원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졌고, 느슨했던 공기마저 팽팽해졌다. 비행기는 네덜란드 상공을 우회하고 있었다. 조그만 창문으로 바라다본 저만치 아래에는 온통 노란 띠의 물결이었다. '튤립'이란 나의 외침에 옆자리 아주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무어라 덧붙였지만 모르는 말이었다.
이륙 전, 국적을 불문하고 비행기의 기장은 하나같이 입을 모은다. 그리고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그들은 뱉은 말은 지킨다. 12시간의 비행 결과 영국 런던, 그리고 히스로 공항이었다. 순탄했던 비행에 큰 도움을 준 내 나라 청년들과, 옆자리 아주머니에게 감사를 표하고 두 남자와 상봉을 했다. 장거리 비행이 내내 걱정되셨는지 틈틈이 내 상태를 체크하시던 아빠께 크게 V자를 날렸더니 내심 놀라신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차량 탑승 시 지독한 멀미 증상을 호소하는 탓에 장거리 여행은 고사하고 남의 차에 덥석 엉덩이를 붙이지 않을뿐더러, 운행 중 급정거는 물론 차량 내 히터에 질색하는,, 그런 내가 유럽 여행이라니.. 것도 프랑크푸르트로의 장거리 비행이었으니, 반대 반대 그런 결사반대가 없었다. 그러나 첫 여행으로 자동차 멀미와 비행기 멀미는 별게라는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지 아빠는 연신 얼굴 구석구석을 살피셨다.
영국의 입국 심사는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 있다. 입국심사대에는 갔으나 불통인 관계로, 울며 겨자 먹기로 귀국행 비행 편에 탑승한 지지리 복도 없는 여행 선배들의 경험을 이미 접했던 터라 정신을 다잡았다. 아니나 다를까 동남아인으로 추정되는 가족이 실랑이 중이었다. 것도 모자라 대열을 벗어나 따로 독대를 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인데 왠지 남일 같지 않았다. 여행책에 의하면, 입국 심사 시 흑인 여성을 조심하라 했지. 우유빛깔을 자랑하는 남자 직원이 손짓을 했고 이에 한달음에 내달렸다. 파리-인천행 리턴 티켓과 여권을 살피며 이것저것 물어보기에 미소를 새기고 또박또박 답하였다. 다음 여정지인 니스행 티켓을 건넸더니, 여권에 스탬프를 찍는다. 합격이었다. 그러나 기쁜 것도 잠시, 우유빛깔 직원이 오른손을 쳐들었다. '낙장불입'.. 이를 설명하기에 충분치 않은 영어 실력에 대한 후회는 파도가 되어 밀려왔다.
"Famaliy?" 그가 물었고
"Yes." 내가 답했다.
괜한 걱정이었다. 다시금 여권을 살핀 이유는 모르겠지만, 가족임을 확인한 그는 별다른 질문 없이 후발대를 심사대 밖으로 후다닥 몰아냈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는 동남아인 가족과 직원 간의 면담이 아직이었다. 상황은 여전했으나 감정선은 과열되어 있었고, 이들의 아픔이 내 기쁨에 묻혔다. 해서 남의 일인 게지.. 배낭도 찾았겠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대합실을 찾아 나섰다.
정녕 이곳이 THE UNITED KINGDOM의 명실상부한 국제공항이란 말인가? 강남 고속버스터미널보다도 못한 컨디션이었다. 두 눈에 아로새겨진 모습은 실망 그 자체였다. 런던은 첫 여정지인 동시에 초행길이었다. 해서 먹거리보다 잠자리를 앞에 두고자 했다. 시내로 접근이 용이한 B&B와,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민박집을 놓고 고민은 이어졌다. 2박 3일의 일정, 물가도 물가지만 교통비 역시 사악하다 정평이 나, 근교 아닌 시내 관광에 중점을 두었다. 여행책에 서술된 바에 의하면 굵직한 랜드마크는 시내 곳곳에 오밀조밀 위치해 있어, 섹션을 나누어 돌아보면 가능하다 했다. 쉼 없이 머리를 굴린 결과 아침으로 토스트, 저녁으로 라면이 무한 제공되는 민박집에 머물기로 했다. 너무 많은 고민을 했던 걸까? 막상 숙소 예약을 하려 하니, 도착일인 8일은 full이었다. 여독을 풀었다 해도, 아무리 직항과 다를 바 없다 한들, 어쨌거나 12시간의 장거리 비행이었다. 환갑이라는 방울을 아빠의 목에 걸며 목소리를 높여 온 여행이라, 기깔나는 호텔은 아니어도 편안한 잠자리를 제공하고 싶었기에, 숙소 찾기에 미친 듯이 열을 올렸으나, 시내 호텔의 가격은 만만치가 않았다. 게다가 시도 때도 없이 민박집 예약비가 솟구쳐 이도저도 못하는 형국이었다.
"저녁 7시 이후 도착에 공항에서 시내까지 가는 시간도 만만치 않을 테고, 짐 찾고 요기하고 이것저것 하다 보면 10시는 되겠지. 기껏해야 6시간, 호텔 가면 아무래도 낫겠지만 그렇다 한들 선잠 잘 거 뻔하니, 왔다 갔다 하지 말고 그냥 여기 있자. 처음도 아니고."
미국 워싱턴-인천행 유나이티드항공이었다. 순조로웠던 비행, 그러나 문제는 경유지였던 일본에서 벌어졌다. 여름의 중간이긴 했으나 들이붓는 폭우로 인해 이륙이 불가능했던 상황이었다. 가까스로 도착한 인천의 상황도 어수선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고속버스는 고사하고 콜밴 하나가 없었다고 했다. 물론, 늦은 밤이긴 했으나 기상악화로 인한 특수 상황에 발이 묶인 채로 동동거릴 수밖에 없었고, 결국 공항에서의 노숙 후 다음 날 첫 버스를 타고 귀가하셨다. 인천 공항에서 밤을 지새운 경험이 있는 엄마의 제안이었다. 바라다본 아빠와 오빠 역시 끄덕이고 있었다. 무언의 긍정임에 분명했다.
'입국 심사 후 수하물을 찾으면 8시는 훌쩍 넘을 테고, 스낵바에서 대충 요기를 하면 10시는 될 테고, 자리 잡고 씻고 이것저것 하다 보면 12시, 그러다 까무룩 잠이 들면 다음 날이겠지.'
기상은 6시, 엄마의 말씀처럼 기껏해야 6시간이었다. 비록 직항과 다를 바 없다손 치더라도, 12시간의 장거리 비행이었기에 몸은 절로 긴장을 했을 터, 아무렴 침대와 의자가 비교가 되겠냐만, 그럼에도 지친 몸은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기절하리라 생각했었다.
'떠나 보니 알겠더라. 내 나라를, 그 나라의 국민임을.' 누군가는 말했다. 애국자와는 거리가 먼 나 역시 이 말을 곱씹고 있었다. 물론, 내가 선 곳은 입국장 밖이었다. 입국장 안은 기깔날지 모르겠지만, 아로새겨진 입국장 밖의 상황은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바라다본 엄마의 얼굴 역시 굳어 있었다. 8시가 넘은 상황, 자리 확보가 시급했기에 오빠와 구역을 나눠 탐색에 나섰다. 잠시 후, 미팅 포인트였던 부모님이 계시는 자리로 가, 먼저 도착해 있던 오빠를 뒤쫓으니 2층의 제법 널찍한 공간이었다. 쾌재를 부르기도 잠시, 한 남자가 무릎이 닳도록 절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믿음 약한 선데이 신자라 한들 이건 아니지. 아쉬움을 애써 누르며 pray room을 나섰다. 그러나 내부 공간을 이 잡듯 뒤져도 변변한 곳은 없었다. '혹 예약을 취소한 누군가로 인해 빈 방이 있을 수도' 하는 생각에 민박집에 전화를 걸었지만, 그런 꿈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공항 밖으로 나와 주위를 둘러보는데, 장거리 버스 터미널 대합실이 보였다. 부리나케 달려가 안을 살피니, 썰렁하기는 해도 손잡이 없는 3개짜리 의자가 있었다. 이건 누울 수 있다는 것,, 한달음에 가 상황을 보고하니 가족들은 망설이지 않고 내 뒤를 따랐다. 도착한 대합실 안 구석 한쪽에 그새 어떤 이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노숙을 대비해 착륙 전, 쟁여 둔 담요를 깔고 바람막이 점퍼의 지퍼를 단단히 채운 후 몸을 뉘었다. 정녕 지금이 5월이 맞는가? 덜덜덜- 쉴 새 없이 이가 떨렸다. 쿠션감 하나 없는 딱딱한 의자로 인해 몸은 마비되는 것 같았다.
"노숙은 원래 이런 거야. 집 떠나면 고생길 시작인 거 뻔한데, 호사를 바라면 쓰나. 괜찮아."
가족들이 건넨 위로의 말에 울컥했다. 섣부른 내 판단을 비웃으며 영국, 런던 히스로 공항이 보낸 격한 환영에 울분이 솟구쳤다. 일렁이던 물결은 어느새 성난 파도가 되어 쉬 진정되지 않았다. 한국은 5월 9일이겠지만 런던은 5월 8일이었다. 잊지 못할 어버이 날인 동시에 명백한 불효의 날이었다. 지독했다. 추웠다. 그리고 괜스레 눈물이 났다.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이 모든 것이 그저 꿈이기를 바랐다.
현실의 벽 앞에서, 북받치는 설움에, 멈추지 않는 눈물까지,, '5월 9일~ 당장 오너라!!' 하며 말똥말똥 한 두 눈을 억지로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