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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떠나 본다

1. 이번에는 가족 여행이다.

- 가족과 떠난 유럽 배낭여행 -

by 슈크림빵

'다음은 가족 여행이다.'

2005년 10월의 끝자락.. 융프라우요흐 정상에서 혼자만의 다짐을 했다. 그리고 2008년 5월 7일.. 우리 가족은 인천 공항 출국 심사대를 통과했다. 그건 곧, 대한민국과 안녕이며 되돌리기엔 이미 늦었다는 것, 우리를 실은 JAL은 푸른 창공 속으로 빠르게 날아올랐고, 그로부터 2시간 30분 후 목적지인 도쿄 나리타 국제공항(NRT)에 도착했다. 일본은 경유지였다. transist 심사대에 선 순간, 찌를 듯한 경보음이 귓속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고, 이에 오만상을 쓰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누구 하나 허둥대지 않았다. 여전히 경보음이 울리는 가운데 제자리를 찾은 시선에 뚫어질 듯 쳐다보는 직원이 꽉 차게 들어왔다. 제복에 설렐 나이가 지나서일까? 막연한 두려움이 먼저였다.


'혹 출국심사대에서 발각된 고추장과 과도가 든 배낭 때문에? 에이, 수하물은 입국 심사 후의 과정이니 그건 아닐 테고.'


조금 전, 인천 공항 출국심사대에서의 상황은 이러했다. 합격 통보를 받기 위해 신발까지 벗은 채로 직원의 지시에 따르던 중, 뒤쪽에 선 오빠와 직원 간의 면담이 이어졌다. 마치 38선을 사이에 두고 탈출한 3인과 남겨진 1인을 보는 듯했다. 제법 거리가 있었기에 내용 판독은 어려웠으나 두 사람의 대화는 한참이나 이어졌고, 가까스로 심사대를 빠져나온 오빠는 마치 풍선에서 바람 빠지듯 이야기를 토해냈다. 그렇게 듣게 된 사건의 전말은 이와 같았다.

항공사 수하물 제한 무게는 25KG, 과태료를 내지 않겠다고 무게를 재고 가방을 풀었다 다시 싸기를 수차례, 그 과정에서 수하물에 넣어야 할 고추장과 과도를 배낭에 넣고 검색대에 섰으니 당연 문제가 될 수밖에,, '버리겠느냐? VS 가져가겠느냐?'의 선택의 기로에서 후자를 선택했단다. 63일의 일정을 고려하면 당연 고추장은 필요했고, 과일을 깎든 호신용으로 쓰든 과도 역시 필요했기에,, 과태료는 없었지만 경유지인 일본까지였다. 깊은 상념 속에 빠진 나를 현실 세계로 이끌어 낸 건, 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


"Perfurm!!"이라 외치는 그에게,,

'직업 특성상 수많은 사람들과 그들이 소지한 여권을 지겹도록 볼 테지. 그래 맞아. 두 번째 여행인지라 내 여권은 여백의 미가 가득 하나, 그렇다고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초짜는 아니라고. 면세점에서의 쇼핑은 마지막인 파리에서나 할 거라고, 이 사람아!!' 이 모두를 담아 있는 힘껏 쏘아보았다.


그는 타격감이라고는 1도 없는 소위 목석이나 다름없었다. 내 보조 가방을 제 손에 쥐고, 조심스레 지퍼를 열어 가방을 벌린 후 내 사정권 안에 들어오게 위치까지 조정했다. 면장갑을 낀 그의 손이 가방 안을 휘젓기를 얼마 마치, 낚싯대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우치가 딸려 나왔다. 그는 재차 파우치를 열었다. 그러고는 조그만 통을 꺼내 내게 들이밀었다. 채 5ml도 담기지 않은 샘플이었다. 이게 문제가 된다고? 그가 말한 향수병이 맞았기에, 그쯤에서 상황은 일단락되었어야 했건만, 정확히 이 시점부터 나는 심히 일렁였다. 인천에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조그만 향수 샘플이 일본에선 문제가 된다? 일관성 없는 방침에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제 면전에서 성난 콧김을 내뿜든 말든 이에 동요치 않고 그는 묵묵히 자신의 일을 했다. 조그만 지퍼백에 향수병을 담은 후 파우치의 지퍼를 닫아 원래 있던 자리에 넣고 가방의 지퍼까지 야무지게 채웠다. 이로써 처음 상태 그대로가 되었다. 그러고는 마침표를 찍듯, 여권을 돌려주고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까지 덧붙였다. 더해봤자 나라 망신, 좋을 것도 없기에 일단 심사대에서 몸을 물렸다. 장소는 벗어났지만 그러나 상황은 여전했다. 깜냥껏 들이마신 숨을 길게 토해내며 절로 숙인 고개를 원위치한 시선에, 가족들이 아로새겨졌고 이에 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곧 나아질 거라 애써 다잡은 마음을 비웃듯, 한번 엉킨 스탭은 좀처럼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흐르는 시간은 내 편이 아니었고, 배낭 역시 찾아야만 했다. 다급한 마음은 앞서 나가 유니폼을 입은 직원 앞에 서게 했다.


나: baggage claim??

직원: 씩~ 웃는다.

나: suit case??

직원: 씩~ 웃는다..

나: 어~ 웃어?? 영어 모르나? 다시,, 천천히 Do you know baggage claim? 응??


계속되는 나의 재촉에 얼굴까지 빨개진 직원은 도통 모르겠다는 제스처를 하고 되레 멋쩍은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예전 TV 프로그램 <가족오락관>에 '몸으로 말해요'라는 코너가 있었다. 이를 이국땅에서 재연할 줄이야. 우려와는 달리 바디랭귀지는 통했다. 고개를 끄덕인 그는 손에 쥔 워키토키를 입으로 가져갔고, 그제야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러나 도통 모르는 일본어였고, 체격만큼이나 힘 있는 중저음의 톤이었다. 다른 상황이었더라면 좋았으련만.. 그렇게 바라본 직원은 스스로가 일본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아무리 애국자여도 국제공항이고, 명색이 직원이라면 만국 공용어쯤은 숙지하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심전심이었나 보다. 우리의 동문서답에 답답하셨는지 결국, 엄마가 출동하셨다.


"이 사람아, 그리 서서 웃지만 말고 직접 데려다주면 될 것을."


미소를 머금고 있었으나 심히 당당한 말투였다. 어설픈 발음의 영어, 일본어 그리고 한국어의 출구 없는 싸움이 끝을 맺은 건 요지부동의 자세로 버티고 섰던 직원에 의해서였다. 갑자기 걸음을 떼더니 뒤를 돌아보며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아뿔싸!! 그를 따르니 입국심사대 앞이었다.

부모님 입장에서 보면 직항이 맞고, 가격면에서는 경유가 옳았다. 고민의 늪에 빠진 내가 보기 안쓰러웠는지 여행사 직원은 달콤한 제안을 해왔다.


"일본은 처음이라 하셨죠? 경유 말고 체류는 어떠세요? 도쿄 나리타 공항까지 2시간 30분 여정, 하루지만 여독을 풀고 가면 런던까지는 직항이나 다를 바 없으니. 63일 일정이고, 영국이 8시간 늦다는 거 아시죠? 숙소는 비행기 값에 포함됩니다. 숙소 예약도 도와드릴게요. 오후 도착이라 관광은 어렵겠지만, 잠자리는 편할 거예요. 저는 나쁘지 않았어요."


솔깃했다. 아니 실장이자, 중학생 아들이 있는 40대 중반의 그녀를 절대적으로 믿고, 그 자리에서 카드를 건넸다.


국제선에서 다시 국제선으로 환승 시, 경유지에서 보안 검사를 받아야 한다. 보안 검사 후 다음 비행 편까지 탑승 구역에서 대기하는 경우에는 입국 수속을 할 필요가 없으나, 외출 혹은 체류등의 이유로 공항 밖으로 나갈 때에는 반드시 입국 수속이 필요하다. 결국, 보안 검사만 마쳤을 뿐, 체류를 위한 입국 수속은 아직인 셈이었고, 수하물은 그 후의 일이었다. 좀 전 transist 심사대에서의 실랑이 때문이었을까? 선두에 선 사람이 방향을 못 잡으니 따르는 이들은 오죽했을까? 여권 검사와 지문 스캔까지 마치니 그제야 입국이 허가되었다. 입국심사대를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눈을 떼지 않고 배웅해 주던 일본 직원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지 않았으나 이제 막 심사대로 들어오는 비행기 앞자리의 큰 바위 얼굴을 한 그와 마주치자마자 눈인사 하나 건네지 못한 옹졸함은 곧 후회로 바뀌었다. 부랴부랴 과도와 고추장이 담긴 배낭을 찾아 공항 밖으로 나오니 커다란 몸체에 호텔 이름을 새긴 셔틀버스들이 정차해 있었다. 호텔 예약 확인 메일을 내밀었더니 기사님은 손수 캐리어를 실어 주셨다. 지친 몸은 의자에, 생각 많은 머리는 차창에 기대었다.


15분 여를 달려 도착한 HOTEL NIKKO NARITA는 인테리어와 객실 컨디션 앞에 위치와 가격을 먼저 두어야 한다는 여행사 실장의 말 그대로였다. 배정받은 2인실은 나란히 놓인 침대와 조그만 테이블, 미니 냉장고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비좁은 구조였다. 욕조 딸린 욕실로 인해 찡그려졌던 미간이 그나마 펴졌다. 커튼을 젖히니 넓은 통창에 방해꾼 하나가 없어서 벌러덩 누워 창밖을 바라보았다. 몸을 지탱하는 침대의 쿠션도 창밖의 풍경도 나쁘지 않았다.

호텔에서 약 20여분 거리에 AEON MALL이 있고, 셔틀버스가 운행된다 하기에, 우리는 밤의 일본을 맛보기로 했다. 호텔 로비를 막 빠져나가려는데, 비행기 앞자리의 큰 바위 얼굴과 다시금 만났다. 눈썹을 꿈틀대는 그를 외면하고 서둘러 셔틀버스에 올랐다.


저녁노을은 길게 꼬리를 내리고 있었고, 도로 위로 차들이 빼곡했다. 퇴근 시간의 풍경은 어디나 같나 보다. 오늘 저들의 저녁 메뉴는 뭘까? 보글보글 된장찌개랑 보들보들한 계란말이?? 달랑 김치 하나뿐이어도 가족이 함께하는 저녁 식탁은 늘 행복하다. 그렇기에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늘 가볍고 경쾌한 것이 아닐는지.. 조금 전까지의 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좁다란 왕복 1차선 도로를 벗어나니 하늘은 컴컴해지기 시작했고, 고층 건물들이 하나 둘, 그리고 무더기로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을 뱉어내고 또 삼켜 버리기에 바쁜 이름 모를 JR역, 그리고 주변을 종종대는 사람들,, 사람 사는 건 어디를 가나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STARBUCKS를 시작으로 AEON MALL의 1층은 가게 반 사람 반이었다. 그것들에 연신 고개를 돌려대던 순간, 비닐봉지에서 고기팩을 꺼내는 사람을 발견했다. 이건 마트가 있다는 사실,, 아니나 다를까 저만치에 쇼핑 카트가 보였다. 컵라면과 햇반에 곁들일 간식거리 구매가 이곳에 온 8할의 이유였다. 넉넉지 않은 엔화였기에, 각자 먹고픈 것을 고른 후 금액을 맞추기로 했다. 치킨가스, 샌드위치, 맥주, 생수, 그리고 컵우동,, 맥주는 오빠 몫이고, 가만 컵우동은??

"내 거야."

"초입에 우동 가게 있어요. 제대로 된 것을 드시지."

"이거 먹을래, 제일 맛나게 생긴 놈으로 집어 왔거든. 봐봐."

몇 해 전, 지인들과 일본 여행을 다녀오신 엄마는 일본 우동에 적잖이 실망하셨단다. 우는 아이 달래는 것만큼이나 엄마 고집을 꺾기 힘들기에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 this machine is not working!!"

"어쩌고 저쩌고~"

호텔로 되짚어가기엔 조금 이른 시간, 깜박하고 챙기지 못한 알람을 사기 위해 2층 다이소로 향했다. 정확지 않은 발음의 영어와 일본어가 다시금 충돌한 상황으로 합의점을 찾기란 매우 어려운 모양새였으나 그때, 연식이 좀 있어 보이는 남자가 빠르게 다가왔다. 그건 아마도 조금 전 직원이 전화를 걸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테지. 내 손의 것을 제 손으로 가져가더니 손바닥보다 작은 알람을 요리조리 살폈다. 그리고 그의 검지손가락이 내 눈에 아로새겨졌다. 설마 삿대질?? 곧추 세운 그의 손가락이 급하강을 하기에 따라가 보니 어머,, 웬일이니!!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내가 설정한 시간은 am 7시 55분, 잠시 후 손목시계가 pm 8시를 알리자 삐삐삐삐- 알람은 힘차게도 울어댔다. 시간을 재설정하며 바라보던 직원의 서늘한 눈빛이 다시금 떠올랐다. 다이소 진상녀 얘기에 웃음보 제대로 터진 우리 식구들, 그런데 엄마 홀로 다른 그림이었다.

"계산하려는데 놓여 있더라. 누군가 놓고 갔나 봐. 우리 거라 여겼는지 점원이 그냥 담더라."

참치 삼각김밥.. 눈도 입도 이미 아는 맛이었다. 이내 얼굴을 붉히시며 헛기침까지 하시는 엄마를 안정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도둑질한 것도 아니고, 다시 갖다 준다 한들 뭐라 설명하실 건지. 이렇게 된 거 그냥 덤이라 여기고, 정 떨떠름하시면 내가 먹을게요."

공짜여서일까? 본디 참치 삼각이 이리도 맛났던가!! 짭조름한 김과 담백한 참치에 고소한 마요네즈,, 익숙하지만 다른 맛이었다. 쌍엄지를 올리며 온갖 수선을 떠는 내 노력에 엄마의 얼굴색이 서서히 돌아오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9시를 조금 넘겨서야 호텔행 셔틀버스에 몸을 실었다. 엄마 연배의 아주머니는 양손 가득 선물 꾸러미를 든 탓에 힘겹게 버스에 오르면서도 세상 행복한 표정이었다. 하와이에 사는 아들에게 줄 선물이란다. 어머니들의 대화는 무르익었고, 처음이었으나 그렇다고 낯설지 않은 밤의 모습에 난 빠져들었다. 낯선 곳, 낯선 사람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일들, 그로 인한 행복한 기억들.. 여행이란 그런 것이며 그렇기에 무작정 떠나고픈 것은 아닐까??


야식은 언제, 어디서든 옳다. 그리고 엄마의 선택 역시 옳았다. 그깟 인스턴트라고 감히 돌을 던질 용기가 나에게는 없었다. 욕조 가득 물을 채우고 몸을 담그니 종일 긴장했던 어깨도, 누적된 피로도 사르르 녹아내렸다. 열린 창문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봄의 밤공기가 달큼했다. 훅- 들어온 밤의 풍경으로 인해 불쑥 솟은 예상치 못한 아쉬움을, 내일의 영국을 상상하며 애써 눌렀다. 좀 전까지 불을 밝혔던 호텔 라운지가 어둠 속에 묻혔다. 그리고 내 두 눈 역시 소등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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