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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떠나 본다

7.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는..

- 가족과 떠난 유럽 배낭여행 -

by 슈크림빵

유럽 여행의 필수품인 유레일 패스는 비유럽권 국가 여행자들만 사용할 수 있는 입석 티켓으로, 프랑스의 TGV, 이탈리아의 ESI, IC PLUS, 벨기에 THA, 스페인의 TALGO 등의 초고속 열차 이용 시에, 또는 호텔 특급 열차, 야간열차의 콤파트먼트 혹은 Couchette 등을 이용할 시에 별도의 좌석 요금을 내야 한다. 하지만 예외도 있다. 독일의 ICE는 별도의 추가 요금 없이 이용이 가능하다. 단, 빈 좌석에 한해서라는 것,, why?? 당신과 내가 가진 티켓은 only 입석 티켓이니까!! 흰 바탕에 매끈한 바디를 자랑하는 흡사 백사를 떠올리게 하는 ICE.. 도시와 도시를 잇고 나라와 나라를 넘나드는 녀석의 매력에 풍덩 빠져 있었다. 하여, 별안간 솟은 아쉬움은 스쳤던 인연 때문일 테지..




박정희 대통령 집권 당시의 일이다. 일본 국유철도가 신간센으로 적자 탈출에 성공하자, 철도청의 개선을 목표로 세운 계획들 중 '서울-대전 간 급행 고속전철 건설 방안'이 현재 고속철도 사업의 뼈대였다. 당시, 고속철도 시스템을 보유한 일본, 독일, 프랑스가 차량 선정을 목표로 경쟁을 하던 중, 라이선스 및 생산, 기술 이전 등의 어긋난 조건으로 일본이 탈락함에 따라 독일 ICE와 프랑스 TGV의 경쟁으로 일축되었다. 성능, 차관, 기술 이전 등의 각종 조건이 국내 실정에 적합하다는 이점으로 경쟁 초반부터 독일이 우세했으나, 협상 테이블에 앉은 프랑스는 독일 대비 파격적인 라이선스와 생산 허용 조건을 제시하였고 결국, 사업권을 손에 쥐게 된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협상 과정 당시, 세간의 눈을 의식한 듯 프랑스는 은밀한 제안을 해왔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병인양요 때 그들이 훔쳐간 외규장각 의궤를 반환해 준다는 것,, 민족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본이 돌아온다' 어찌 반갑지 않을까. 그러나 이를 반박하는 목소리가 뒤따랐다.

첫째는, TGV 도입의 이유는 다수의 조건 중에서도 특히 파격적인 차관 조건이었고, 수도권 집중 방사형 체제의 한국 철도망과 프랑스 고속철도 구조의 유사성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었다. 프랑스가 파리 중심의 고속 철도망을 유지하기 위해 단시간 내에 선로 보수 시스템이 발전한 반면,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는 독일의 철도망은 국내 사정에 적합하지 않다는 점을 근거로 내세웠다. 즉,, 외규장각 의궤 반환의 딜은 애당초 없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외규장각 의궤와 함께 직지심체요절 역시 프랑스군에서 약탈당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은 병인양요 당시 직지심체요절은 외규장각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고속철도 사업과 외규장각 의궤, 직지심체요절 반환의 상관관계를 두고 어불성설이라 목소리를 높였지만, 차량 선정 당시 양국 대통령의 만남의 장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흥덕사의 터가 발굴되면서 '직지'는 다시금 부각되었다. 병인양요 당시 '직지'가 외규장각에 있지 않았다 하여 분명, 약탈 아닌 구입이라 주장하며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주한프랑스 공사이자 고서적 수집광이던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alncy)가 수집한 고물품 중에 직지심체요절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후 앙리 베베르라는 사람이 재구입하여 소장하였다가 그의 유언에 따라 1950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으로 보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시대 청주목(淸州牧)에서 만들어진 인쇄물이자 전 세계를 통틀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은 어떻게 프랑스까지 가게 된 것일까? 정식 명칭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로 백운 화상(和尙 스님의 경칭)이 추린 부처님의 뜻, 직지심체의 요약본이라는 뜻으로 어려운 이름 탓에 '직지', '직지심체요절'로 축약해 부르곤 한다. 1377년 고려 청주 흥덕사의 고승이었던 백운경한이 쓴 책을 금속활자로 뜬 것으로, 이 경전은 대교과(大敎科)를 마친 학승들이 수의과(隨意科)에서 사용했던 학습서로, 한동안 행방이 묘연하다가 구한말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자, 그렇다면 과거로 가보자. 시대 상황은 구한말,, 주한프랑스 공사관 소재지는 분명 한성이었을 터, 변변치 않은 교통수단은 원거리인 청주로의 접근에 용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대한민국 곳곳 수많은 절 중에 하필 청주, 것도 흥덕사였을까? 더군다나 학승들의 학습서 아니었던가?? 그의 불심이 그리도 깊었단 말인가??? 번뇌에 빠진 학승이 닭다리, 탁주 한 사발과 맞바꾸지 않고서야, 아님 발이 달려 주한프랑스 공사관으로 망명 신청을 하지 않고서야 가능할 법한 얘기인가?

왕실 관련 서적에 끼여 혹은 금속 활자본이라는 신기술 업적을 보관하던 중 방화로 인해 상권은 소실되고, 남은 하권은 외규장각 의궤와 함께 약탈해 간 것은 아닌지.. 정말로 약탈 아닌 구입이었다면, 빅토르의 눈썰미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에 대한 기록은 물론, 당사자들 역시 모두 사라져 버려 진실은 알 수 없다. 해서 그 안타까움은 배가 된다.


한국을 방문한 프랑수와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은 김영삼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직지심체요절 및 외규장각 의궤를 포함한 고서적들을 반환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로 약속한 결과, 이후 외규장각 의궤만 반한되었는데, 이는 직지심체요절의 반출 경위가 약탈이 아닌 정당한 구입이었다는 명분을 앞세운 프랑스 국립도서관 사서들의 반대 시위에 의한 결과였다 한다. 종내, 외규장각 의궤는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자그마치 145년이 걸린 일엔, 5년마다 대여를 갱신해야 한다는 꼬리표가 달려 있었다. 이에 격분한 시민 단체는 영구 반환 소송을 제기했지만 패소하고 만다. 서구 열강들은 제국주의 시절, 약탈하여 반입한 문화재의 반출을 막는 반출 금지법을 제정해 두고 있기에, 이 법이 폐기되거나 또는 특례로 예외를 적용받지 않는 한, 소송에서 이길 방법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현재도 외규장각 의궤 소유권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갖고 있기에 전시 또는 활용을 주체적으로 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국보, 보물로도 지정할 수 없는 상태이다.


화장실 들어갈 때 나올 때가 다르다는 속담은 프랑스에도 있었나 보다. 그들은 단종된 구형 기종을 떠넘기려 했던 것도 모자라, 제대로 된 기술 전수는커녕, 프랑스 현지 기술진은 거만한 태도로 한국 측 기술진을 얕잡아 보았다 한다. 그러나 왜란, 호란뿐 아닌 각국의 침략 가운데서도 꿋꿋이 살아남은 결과,, 건설, 반도체 분야에서 큰 성과를 이뤄, 더 이상 아시아의 점만한 작은 나라 아닌 원더풀 코리아가 아니던가!! 대물림되는 비상한 머리와 타고난 손재주를 바탕으로 새로운 신기술과 각종 유리한 조건들을 선점한 결과, 초기 도입본 차량들은 마산항으로 들어오게 된다. 1998년의 일이다.




몇 차례의 뒤척임은 있었으나 그럭저럭 근사한 잠자리였다. 2층 침대에서 내려와 선크림을 덧바르고 캡모자를 눌러썼다. 어제의 불미스러운 신경전으로 인해 역무원이 혹 패스에 장난을 했을까 싶어 걱정했는데 다행히 멀쩡했다. 아침은 이성이라 했는데, 이탈리아는 반대인가? 슬쩍 미소 짓는 그를 따라 나 역시 입꼬리를 슬그머니 올렸다. 그러고 보니 제법 봐줄 만한 얼굴이잖아.


거무튀튀한 물 색깔하며, 바삐 오고 가는 수상 버스들, 연신 목을 움직이는 먹보 비둘기 떼들까지,, 다시 찾은 베네치아 산타루치아역과 주변 모습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딴에는 이곳의 명물이라 생각하는지 뒤뚱뒤뚱 움직여대는 몸짓을 보고 있자니, 비둘기 떼의 공격으로 인해 피부 질환을 앓던 로마 민박집에서의 여학생이 떠올랐다. 약국에서 영어가 통하지 않자 궁여지책으로 '도브, 도브,, 휙~!!' 외치고서 주저앉았더니 연고를 건넸다 했다. 잠시 상념에 빠진 틈을 타 비둘기들이 내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녀석들의 목표는 손에 쥔 바게트겠지만, 그건 어림 턱도 없는 말씀,, 긴 팔을 적극 활용해 녀석들을 쫓아냈다. 간식과도 같은 식사를 후다닥 끝내고 휴식을 원하는 엄마께 캐리어를 맡기고 고작해야 반나절인 관광을 위해 산타루치아역을 등졌다.


뻘 위에 말뚝을 박고, 그 위로 벽돌을 쌓고, 다시 그 위에 판돌을 올린 후에 그제야 건물을 세운다. 그렇게 만들어진 물 위의 도시는 하수구가 없고 물이 귀하기에 빗물을 모아 식수로 해결한다. 해서 길을 걷다 보면 바닥에 구멍이 뚫린 빗물 접수장을 종종 접하게 되는데, 이곳에 모인 빗물들은 공동우물터로 가고, 우물 바닥에는 모래와 자갈을 깔아 넣어 모인 빗물을 정수해서 사용한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150여 개의 운하, 400여 개의 다리, 그리고 수상 가옥과 교통수단인 뜨라게또까지.. 베네치아의 극히 일부만을 보았음에도 신기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신이 빚어낸 자연과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빛난 인간의 순종과 개척 정신에 그저 경이롭다는 생각뿐이었다.

베네치아 대운하를 건널 수 있었던 최초의 다리인 리알토 다리였다. 다리 위도 아래도 북새통인 건 매한가지였다. 때마침 다리 아래를 통과하던 곤돌리에르(Gondolier)가 노래 한 자락을 뽑자, 이에 사람들의 환호가 이어졌고 답례인 듯 뱃사공은 크게 목청을 높였다. 음색은 그닥이었으나 그는 뛰어난 장사꾼임에는 분명했다. 제 목을 희생해서 승객들을 우쭐하게끔 했으니 말이다.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좁다란 골목들을 돌고 돌았다. 길을 잃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서지 않았다면 거짓말, 그러나 즐비한 상점들을 구경하고 있노라니 미로 속에 갇혀도 그리 나쁠 것 같진 않았다. 다행이하고 해야 할까? 길을 잃지 않고 목표지점에 닿았다. 듀칼레 궁전 재판소에서 판결을 받은 죄수들이 운하 건너편의 감옥으로 옮겨지며 아름다운 베네치아를 다시는 못 본다는 현실에 한숨을 내쉰다 해서 이름 붙여진 탄식의 다리였다. 그러나 명성과는 달리 이곳을 탈옥한 죄수가 있었는데, 그 이름도 유명한 자코모 카사노바 되시겠다. 대체 카사노바는 못하는 게 뭘까??


듀칼레 궁전을 끼고 걸으니 산마르코 광장이었다. 궁전 입장을 위해 줄지어 선 인파엔 관심조차 없었다. <007 카지노 로얄>에 베네치아는 등장했더랬지. 산마르코 광장의 어느 호텔에서 듀칼레 궁전을 바라보는 남녀, 그리고 미로 같은 골목을 뛰는 본드걸과 뒤를 바짝 쫓는 제임스 본드,, 본드걸로 열연한 카테리나 뮤리노는 실제 이탈리아 사르데냐섬 출신이라 했다. 그녀의 미모도 무색게 하는 베네치아의 아름다움이었다. 해서 많은 영화의 배경이 된 것은 아닐는지.. 사진 찍기를 마다하는 오빠가 크게 손짓을 하기에 냉큼 달려가 보니 분수대 앞의 두 마리 사자상 중 한 녀석과 함께였다. 이유인 즉슨, 몇 해 전 다녀온 미국 서부여행 일정 중, 라스베이거스의 호텔에서 본 적이 있는 사자상이란다. 하긴, <꽃보다 남자> 속에 등장했던 마카오의 한 호텔에서도 리틀 베네치아를 재현해 놓지 않았던가. 이래저래 신난 오빠를 따라 자타공인 명실상부한 관광지에 우리가 있다는 사실에 나 역시 기분이 껑충 뛰어올랐다.


여행책으로, tv로 이미 수없이 접했던 베네치아 그리고 산마르코 광장이었건만, 마주한 현실은 실로 경이로웠다.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라 극찬했던 나폴레옹과도 같은 시선이었다. 광장과 바다가 맞닿은 곳엔 쪽배에 가까운 수수한 자태의 뜨라게또들이 줄지어 정박해 있었다. 베네치아의 한줄평만 같던 어느 여행책에서 본 적이 있는 녀석들을 배경 삼아 사진을 남겼다. 밤의 산마르코 광장은 온통 금빛이라 했다. 조용하게 일렁이는 파도를 배경 삼고 금빛으로 물든 밤의 광장을 상상하며 천천히 걸었다. 물과 색이 빚어낸 셀 수 없는 매력을 기억 속에,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아야 하는 나는 베네치아에서 가장 바쁜 여행자다.


짧은 관광을 마치고 돌아온 곳엔 큼직한 캐리어 네 개와, 그보다 더 위풍당당하신 엄마가 버티고 계셨다.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님도 울고 가실 모양새다. 아이스크림에 더불어 화장실까지 해결한 협상가다운 아빠의 무용담 때문일까? 아니면 입 안 가득 퍼지는 체리향 때문일까? 근엄하던 엄마의 얼굴 표정은 어느새 느슨해졌다. 햇살마저 따사로운 그로 인해 한층 여유로운 베네치아에서의 꽤 늦은 아침이었다. 남자들의 첫 야간열차 탑승을 기념하기 위해 엄마의 지갑이 열렸다. 아침 산책 때문인지 아니면 연신 먹이를 쪼아대는 비둘기들 때문인지 이래저래 배가 고프던 참에 들은 희소식이었다. 첫 경험은 소중하니까, 고로 기념해야지. 솔솔 풍기는 고소한 냄새를 따라 들어간 화덕 피자집 안은 기본인 마르게리타부터 갖가지 토핑으로 구색을 갖춘, 그야말로 피자 천국이었다. 다섯 조각을 켜켜이 쌓으니 저울의 눈금이 빠르게 움직였다. 계산을 마친 조각 피자는 곧바로 화덕으로 들어갔고 적당히 데워진 피자를 종이 박스에 담은 주인은 엄지를 세웠다. 뭐지? 맛이 훌륭하다는 건가? 아니면 대식가임에 놀란 걸까?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은 하나인데 다섯 조각이었으니.. 이뢰 봬도 내일은 피자왕을 꿈꾸고 있답니다. 가벼운 눈인사를 건네고 가게를 등졌다. 이탈리아는 피자에 진심이었다. 기본인 마르게리타부터, 가지를 올린 것도, 새우를 올린 것은 물론, 이름 모를 햄을 올린 것까지 더없이 훌륭했다. 니스에서 시작한 여정은 베네치아를 거쳐 밀라노에서 마무리된다. 매 순간이 이렇다면 감흥은 없겠지. 도시와 도시 그리고 나라와 나라를 오가는 오랜 시간 꿈꿔왔던 여정이, 비로소 현실이 된 순간이었다. 여행자의 신분임에 그저 행복했다.


다시 찾은 이탈리아는 변해 있었다. IC를 업그레이드했다지만, 맞닥뜨린 IC Plus는 무엇이 변했는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고속 열차의 반열에 끼지도 못하는 것에 좌석 예약비를 내라 했다. 자그마치 11유로였다. 겁도 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내색은 안 하셨지만 밤새 새우잠 주무셨을 부모님을 위해 비교적 운행 횟수가 많은 IC Plus를 이용하려 했으나, 터무니없는 예약비에 결국 가뭄에 콩 나듯 운행하는 IC 열차를 타기로 했다. 돈 벌기에 급급한 모습에 그저 어이가 없었다. 뭐 그 점에선 우리네 실정도 다르다 할 수 없지 않은가. 고속철도의 도입으로 인한 무궁화호의 운행 횟수 제한 그리고 통일호의 운행 중단을 보면 말이다. 대한민국의 가장 빠르고 더없이 안전한 발이 되고 싶다던 거창한 슬로건에 순진하게 박수를 쳤다면 거짓말이겠지. 내 나라 사정도 이럴진대 어찌 남의 나라 욕을 하리오. 이래저래 돈이 궁한 놈만 아쉬운 거지. 뭐..


자리에서 일어날 줄 모르는 사람들을 보니 밀라노가 종착역은 아닌 듯했다. 발을 디딘 역사 내, 북적이는 사람들을 보니 퇴근 시간의 지하철역의 모습과 흡사했다. 행여 이산가족이 될까 염려되어 식구들을 소집해 일단 역 밖으로 나갔다. 여행책에 적힌 주소만으로 호스텔을 찾기란 쉽지 않아 현지인의 도움이 절실했다. 하여, 역 주변이면 으레 눈에 띄는 tabac을 첫 타깃으로 정했다.


"Do you know this hostel? (여행책을 들이밀었다.)"

"한국 사람이죠? 그럼 한국말을 해야지 왜 영어를 합니까??"

"그러게요.. 네? 뭐라고요??"


tabac 부스 안을 아무리 둘러봐도 한국인 아니 동양인은 없었다. 잠재의식이 불러온 환청이려니 했으나, 부리부리한 눈매와 오뚝한 콧날의 외국인이 말을 걸어왔다. 분명 내 나라의 언어였다. 뒤따라오신 부모님을 보자마자 대뜸 아버님, 어머님을 연발하는 것도 모자라 아예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가 털어놓은 사연은 이러했다. 몇 해 전, 평택 LG 전자에서 근무할 당시 친절한 한국인의 도움으로 타향살이의 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했다. 한국을 그리고 한국인을 좋아하는 그는 밀라노에서 도움이 필요한 한국인에게 자신이 갚을 차례라 했고, 그 대상이 바로 우리 가족이랬다. 역시 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나 보다. 이에 난 쾌재를 불렀다.


"이 호스텔은 모르지만 가리발디 역은 알아요. 거기까지 데려다 줄게요."

"지하철로 두 정거장이라, 우리는 걸어갈 거예요."

"음.. 걷기에는 너무 멀어요. 내가 아는 조선족 민박이 있는데 잠시만요."


다급히 전화를 거는 것 하며, 엄마의 캐리어를 손수 끌어주는 것 하며, 부득불 지하철 티켓 요금을 지불하는 것까지,, 친절에 더하여 친절을 베푸는 그가 의심스러워졌다. 친절한 사람을 보지 못해서일까? 여행책을 너무 맹신해서일까? 이탈리아 사기꾼에게 걸리면 수중의 돈은 물론 목숨까지도 위험하다는 경고의 문구를 이미 접해서일까? 그러나 섣부른 기우가 아님을 증명하듯, 엄마 역시 경계의 눈빛을 보태셨다. 좀 전까지만 해도 천사 같던 청년이 순간, 사악하게 느껴졌다.


"실은 저희가 그 호스텔에 예약비를 지불했어요. 여기부터는 저희끼리 갈게요.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럼 조심히 가시고 즐거운 여행 하세요."


예약은 무슨.. 가리발디 역까지 동행하겠다는 그를 돌려보내고서야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목적지까지는 단 두 정거장, 그럼에도 멀게만 느껴졌고, 덜컹거리는 지하철을 따라 내 마음도 덜컹거렸다. 게다가 복잡한 감정들이 소용돌이쳤다. 어수선한 채로 도착한 가리발디역과 저녁 빛깔을 머금은 도시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서성이는 나를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택시 기사님도, 상점의 주인도, 온통 모른다는 대답뿐이었다. 혹 그새 문을 닫은 건가? 지하철 역무원이 일러 준 곡목길로 접어들자마자,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호스텔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러나 반가움 대신 의구심이 먼저였다.

현란한 그라피티 아트로 도배된 외벽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어린아이 하나쯤은 거뜬히 잡아먹고도 남을 덩치 큰 개, 거나하게 취한 남녀의 무리, 고막이 찢어질 듯한 음악까지,, 분명 역무원의 잘못된 설명임에 확신을 갖고 여행책을 들춰 보았다. 젊은 분위기의 호스텔에선 다국적 친구를 사귈 수 있고, 어쩌고 저쩌고.. 전부 틀린 얘기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쉬 끄덕일 수도 없었다. 참 아름답게도 포장해 놓은 책의 저자에게 한바탕 욕을 퍼부었다. 골목 초입에서 만난 상점 주인이 고개를 갸우뚱했던 이유가 그제야 이해가 갔다. 발길을 돌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날은 저물고 있었고, 안타깝게도 플랜 B는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지쳐 있었다. 온 이상 일단 가보자는 생각에 송곳니를 잔뜩 드러낸 개를 피해, 게슴츠레한 눈빛을 한 히피풍의 여자를 지나치니 허름한 리셉션 데스크에 닿았다.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남자가 오빠와 나를 반겼다. 우리 둘만 탐색조로 나선 것이 다행인 순간이었다. 그가 제시한 가격은 인당 15유로, 더할 나위 없는 가격이었다. 그것에 미심쩍은 나는 방을 볼 수 있냐는 제안을 했고 그는 두말 않고 2층으로 향해 <Ctrl+V>라 적힌 문 앞에 멈춰 섰다. 문을 열면 검은 선글라스를 낀 키아누리브스가 반갑게 인사를 할 것만 같은 대책 없는 발상은 무어란 말인가? 다행히도 Neo는 없었다. 널찍한 방 안에는 두 개의 2층 침대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어수선한 밖과는 달리 아늑했고 깨끗해 보였다. 샤워 부스를 포함한 두 개의 화장실과 공동부엌까지,, 이만하면 합격점을 줄만했다. 부모님을 모셔 올 생각에 마음은 급해졌다.


마주한 남자가 방금 전 그 직원이 맞단 말인가? 코끝을 자극하는 알코올 냄새, 반쯤 풀려버린 눈동자, 마시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표출인 듯 꼭 붙들고 있는 술병까지,, 숙박계 종이와 방 키를 건넨 후 나비처럼 살랑대는 걸음걸이로 거나하게 취한 무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곳에서 멀쩡한 사람은 오직 우리뿐인 듯했다. 방에 들어가 제일 먼저 창문이란 창문을 모조리 닫았다. 방음효과가 제법이었다. 여차하면 한바탕 쏟아질 듯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기에, 무리의 해산을 위해 세찬 빗줄기를 바라고 또 원했다. 시계 초침은 여덟 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5시 55분에 밀라노에 도착했으니 얼마를 헤맸다는 말인가!!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들어간 공동 주방 안은 쌉싸름한 커피 향이 가득했다. 모카포트는 칙- 소리를 내며 가스레인지 위에서 울고 있었고, 어디선가 나타난 백인 남성과 함께 바로 사라져 버렸다. 이탈리아의 향기가 사라진 주방은 한국의 향기가 점령했다. 코 끝을 자극하는 매콤한 향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황홀했다. 누룽지와 깻잎 통조림까지 더해지니 훌륭한 한상이었다. 때마침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비 오는 날엔 라면이지.


싼 게 비지떡이라고 아무래도 속은 것만 같았다. 샤워실을 포함한 화장실이 두 개면 무엇하리. 냉수만 콸콸 쏟아지는데.. 샤워기와 싸우고 있는 나는 물론 내리는 비도 관심 없다는 듯, 창 밖의 무리들은 여전히 파티 중이었다. 별안간 느껴진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았는데 들어온 남자가 더 놀란 모양이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감쌌는데 다행히 옷은 입은 상태, 문을 잠그지 않았던 것이다. 남자의 설명대로 세면대 물을 트니 샤워기에서 온수가 쏟아졌다. 지 목 축이느라 내 몸 적시는 방법은 설명하지 않은 직원이 미울 뿐이었다. 이렇게 침침한 전등은 처음이었다. 일기 쓰는 걸 중단한 채 길고도 험난했던 하루를 돌아보았다. 막힘없이 돌아가던 머릿속이 tabac 청년에서 멈추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가족 모두가 미안한 마음이었다. 청년에게 사과를 하리라 마음을 먹으니 불편했던 마음은 한결 편안해졌다. 창밖에는 쉼 없이 비가 쏟아졌고 내 두 눈엔 잠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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