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평 남짓한 공간에 놓인 네 대의 커피 머신, 시모넬리 아피아의 검은색 스팀 레버를 아래로 잡아당기자 칙- 소리와 함께 뽀얗고 따스한 온기가 새어 나왔다. 장소도 기계도 여전함에 피식하는 찰나, 문이 열리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생글거리는 눈빛을 한 성은이 서 있었다.
“수업 시작하려면 아직이야. 학생.”
“거짓말 성의 없게 하는 건 여전하네. 낯가림 심한 너를 위해 좌뇌 우뇌 풀가동해서 예전 모습 그대로 재연해 놓은 거니 행여 딴소리만 해 봐.”
“바람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조만간 곳간 열쇠 손에 쥐신다는,, 해서 눈도장인 건지 아니면 텃밭 다지기인 건지, 사람도 일도 불투명한 건 영 질색이라서요. 물질과 권력을 금하고 안빈낙도하는 삶이 내리 이어져 온 집안 가풍인지라."
“신라 시대 대학자 최치원 님의 까마득한 후손인 거 내가 또 잘 알지. 나는 네가 그래서 좋아. 멀쩡하게 생겨서 멀쩡하지 않게 말하는 거."
“원장님 밑에서 그새 선수 다 되셨네. 그건 좀 별로다.”
“원장님 아직 건재하시고, 삼고초려한 내 기획안이야. 이왕지사 온 김에 확실히 도와주는 거야. 딱 여덟 번. 나는 너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파이팅.”
낯선 소리의 근원지를 향한 성은의 두 눈은 웃고 있었다.
“좋은 일 하신다기에 손 보태러 온 건데 두 분의 대화가 너무 진중해서, 시간은 가고 있고 들어는 가야겠고 딱히 생각나는 말이 없어서, 그래서.”
자기소개는 이만하면 되었다는 표정으로 저벅저벅 걸어와 성은 곁에 멈춰 선 인범의 눈썹이 슬며시 올라갔다.
“맞죠? 반가워요.”
“두 사람, 어떻게 아는 사이야?”
맞닥뜨린 상황이 궁금하고 반가운 성은이 운을 떼었다.
"바르다 가정의학과 건물 1층 커피숍 사장님, 맞잖아요. 그렇죠?”
“.. 네.”
복장만 바뀌었을 뿐, 달에 두어 번 발도장 찍는 제약 회사 직원이었다. 세상 참 좁다고 이래서 말은 제주도로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이 있는 거라며 정은은 마지못해 인사를 건넸다.
“여기서 다 뵙네요. 반갑습니다.”
“취지 좋고, 두 사람 합은 물론이니 기대된다. 선수들 입장할 시간이야. 서두르자고.”
한껏 들떠서 이 말 저 말도 모자라 어깨까지 들썩이는 성은과는 달리 정은은 커피 머신이 놓인 테이블에 엉덩이를 걸친 채 돌아가는 상황을 삐딱하게 바라다보았다. '이 조합 별로인 거 같은데..'
커피 머신이 내뿜는 소음, 테이블과 머그잔이 부딪치는 소리만 가득한 텅 빈 교육장 안의 정적을 깬 건 정은이었다.
“고작 여덟 번에 인성을 바꾼다는 건, 유토피아적 발상 아니에요?”
“요즘 만 원이 어디 돈이니? 근데 마트 가봐라. 단돈 만 원으로 살 수 있는 게 무궁무진하다고. 중요한 건 횟수가 아니라 찰나인 거지. 너의 진심이 나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그런.”
인범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본 정은은 이때다 싶어 반응했다.
“누가 회사원 아니랄까 봐 윗사람 말에 자동 끄덕이는 것 좀 봐.”
“틀린 말도 아니니. 좀 다르게 말하자면 날카로운 칼날의 아픔 때문에 두려움을 잊을 수 있어 자해하는 거라는, 우리가 그 칼날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서 주고받기에 좀 무겁지 않아요?"
“인도주의니 그런 건 잘 모르겠고, 지친 청소년들에게 이런 세상도 있다는 걸 알려 주는 거, 의미 있지 않은가요? 그래서 두말 않고 오케이 했는데.”
이번에는 성은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좋은 취지에 홀딱해서 오긴 했다만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이 미완성될까 봐. 색안경인지는 몰라도 진 빠지게 하는 애도 있고."
목소리를 한 톤 내리고 정은은 한 음절 또박또박 뱉어 내었다.
“너네 기수 중에서 제일 기운 센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뾰족해서는 목소리 깔고 다나까체로 답하길래 차마 난 엄두가 안 나서 윤쌤 뒤로 숨은 거야."
"여자들 상대로 여자가 나선다? 이 무슨 경우 없는 일인가."
끙- 앓는 소리를 내고도 부족했는지 이내 성은은 눈알을 크게 부풀려 쏘아보았지만, 정작 정은의 반응이 덤덤하자 빳빳했던 기세는 금세 사그라들었다.
“목마를 때 우물이 되고, 더울 때 그늘막이 되어주고 싶을 뿐이야. 삶을 송두리째 바꾸자는 그런 거창한 게 아니라.. 길을 잃지 않게 나침반이 되었으면 하는, 그런.”
“내 취향은 아침 드라마지 교육 방송 아니에요. 윤쌤이랑 김쌤 사이에 엉킨 스토리 있다고 하도 수군대길래 수업 한 번을 안 빼먹었던 거고, 윤쌤 있었으면 이거 내 몫 아닌데, 해서 잘 지낸데요?"
“몰라. 연락이 잘 안돼.”
“무슨 일이 있었던 거 같은데.”
“수군덕대던, 오해하던 그딴 거에 목 안 맨지 오래다.”
"사랑은 묻어두는 거야.. 왜 내 귀에는 이렇게 들리지? 노선 확실히 정해요. 부릴 때는 가족이라지만 버릴 때는 가차 없는 게 갑과 을의 관계라고요. 윤쌤이 현명한 거지. 암.. 원장님 관상이 심술만 가득이고 복은 하나 없는 상이라. 지금은 마음만 아프지 더 있다간 몸도 아플지 몰라."
“새겨들으마. 여러모로 고맙다. 인범이 너도.”
학원 밖으로 나온 정은은 건물 4층에 위치한 교육장을 물끄러미 올려다 보았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보던 시선은 모든 것이 명확했는데 반대의 시선이 되니 회색 콘크리트 벽면에 높이 매달린 선팅이 된 자그마한 창문이 다였다. 그녀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정말 모르겠다.”
“데려다 줄게요.”
지는 해를 등지고 선 인범의 검은 눈동자가 마주한 정은의 대답을 재촉하였다.
“집 가는 길이 아니라.. 아닙니다.”
‘지금 막 통성명한 당신과 무슨 말을 하겠소.’ 입을 꾹 닫으며 정은은 불편한 심기를 표정으로 드러냈다.
“거짓말쟁이.”
“내가요?”
“직업적 특성상 시각보다 청각이 발달되어 있어 목소리로 사람 기억한다면서요. 근데 왜 한 번에 못 알아볼까?”
슬며시 올라간 인범의 입꼬리가 왠지 미운 정은은 목소리와 얼굴 근육을 최대한 활용해서 비죽거렸다.
“김쌤이랑 엄청 친한가 봅니다.”
“거 아닌, 매장에서 손님이랑 얘기하던 거 들은 거고.”
“.. 아.”
“거짓말한 거 퉁칠 기회 줄 테니 사양하지 마요.”
“억지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도 아니고 모를 수도 있는 거지. 스며들지 않는데 어떻게 기억합니까?”
날이 선 정은과는 달리 빤히 바라보던 인범의 고개는 조금 갸우뚱했다.
"미안, 미안.. 빛의 속도로 정리하고 총알처럼 내달려온 거니까 이해들 하고. 뭐지. 이 분위기는?"
거친 숨을 고르며 말까지 뱉어내느라 여간 힘이 든 성은이었다.
“모로 가도 밥집만 가면 되는데, 납치는 범죄라 안되고, 일단 차에 태우자 했는데 그 마저도 쉽지가 않아서요."
뒷목을 만지며 인범은 몸소 난감해했다.
“어쨌거나 인범이 굿잡.. 수고한 그대들 밥 먹으러 가자고.”
“잠깐, 이 상황 나만 모르는 거 같은데 선 설명, 후 행동.. 이게 맞는 거 아닌가?”
“오늘 할 일 끝났고 이제 곧 배꼽시계 울릴 테니 밥 먹으러 가자는데 무슨 설명씩이나! 별거 아닌 일 별거 만드는 거, 늙는다는 증거란다. 가자고 좀.”
억지로 등을 떠미는 성은의 손길을 뿌리치며 굼뜨게 움직이는 정은을, 인범은 말없이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