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지점프대에는 올랐다만

- 보통의 연애소설 -

by 슈크림빵

“두 분은 어떻게 친해지게 된 거예요? 이름이 비슷해서, 그런 뻔한 답 말고.”

"거 맞는데.. ㄱㄴㄷㄹㅁㅂㅅㅇㅈ, 시옷과 지읒 사이에 이응이 있으니까. 오성이랑 한음을 과-가 연결하고 있듯 성과 정 사이에는 은- 이 있으니까. 성은, 정은.."

말해놓고도 웃긴 모양인지 정은은 웃음을 흘렸다.

“멀쩡하게 생겨서 이런 말 툭툭 뱉기에 궁금했어. 혹 돌아이는 아닌가 하고.”

정은을 향해 눈을 찡긋하고는 성은은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내 이름에도 이응 들어가는데, 그럼 나도.”

"에헤이. 그건 아니지. 기역이 왜 첫 번째 게요. 빈도수가 많아서 그런 건데, 현용하는 한글의 기본 자음자 열네 개 중 여덟 번째잖아. 그건 이응 역시 방방곡곡 널리 퍼져 쓰이고 있다는 얘기니 굳이 역지 말자고요."

“못 말리겠다.”

소주잔을 비운 성은은 정은의 말을 안주 삼았다.

"it's my turn. 두 사람 사이는 내가.. 너였던 게로구나. 김쌤의 새로운 뮤즈가. 버림받은 윤쌤을 위해 묵념, 아니 건배."

소주잔을 단숨에 들이켠 정은의 미간에 실주름이 새겨졌다.

“신경 쓰지 말고 많이 먹어. 공깃밥도 시켜. 자기.”

“동작 그만. 삼겹살이 머물다 간 기름밭에 김치랑 김가루 잔뜩 올려, 국자가 꾹꾹- 힘준 자리에 고스란히 눌은 볶음밥 한 수저 크게 떠서 입 안 가득 오물오물해야, 잘 먹었다 하는 거지. 요는, 볶음밥 전에 공깃밥은 반칙입니다.”

“그건 니 취향이고, 인범이 취향은 삼겹살에 공깃밥이야. 힘든 일 도맡아 했으니 많이 먹어. 자기.”

“듣자 듣자 하니까 진짜, 말끝마다 자기래. 고 3 수험생을 둔 학부모가 새파랗게 어린 남자한테, 5000년의 유구한 역사가 부끄럽지도 않아요?”

들고 있던 젓가락으로 사정없이 테이블을 내리치는 정은의 행동이 거슬렸는지 인범의 입이 급히 열렸다.

“술주정인 건지, 하소연인 건지.”

“뭐요?”

“부르고 싶으면 부르던가.. 자기라고.”

마지막 네 음절에 힘을 주어 말하는 인범이 목소리에, 슬며시 올라간 입꼬리에, ‘지금 이죽거리는 거 맞지. 맞는데.’..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정은은 냅다 쏘아댔다.

“미쳤나 봐. 제일 나빠. 당신이."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그러다 정든다. 귀여운 것들.”

성은이 핏- 웃었다. 말없이 소주잔 테두리를 매만지는 잠잠한 인범의 태도가 못마땅하다는 듯, 정은의 목소리에 한차례 힘이 실렸다.

“미국 영화 안 봤어요? oh no!! 감정은 이렇게 싣는 거다. 마!!”

수면 위에 걸친 붉은 해인 제 모습과는 다른 수면 저 아래 물살에 가부좌하고 있는 물고기인 인범으로 인해 정은의 전투력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재미없어. 치.”

"이 지구상, 바늘 하나, 음, 밀씨 하나가 꽂힐 확률, 어쨌거나 대단한 인연으로 지금 이렇게 대면하고 있다는 게 팩트. 아~ 예전엔 다 외웠었는데."

성은의 얼굴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이 지구상 어느 한 곳에 바늘 하나를 딱 꽂고 저 하늘 꼭대기에서 밀씨를 하나 떨어 뜨리는 거야. 그 밀씨 하나가 나풀나풀 떨어져서 이 바늘 위에 딱 꽂힐 확률, 그 계산도 안 되는 엄청난 확률로 지구상, 하고 많은 나라, 대한민국, 그것도 모자라 지금 이렇게 만나게 된 겁니다. 그걸 인연이라고 부르는 거고, 해서 인연이란 게 좀 징글징글하다는.."

“소문대로 명석하십니다.”

활짝 웃는 성은과는 달리 입을 비죽거리며 정은은 중얼거렸다.

“명석은 개뿔. 요즘 애들은 이런 멘트에 넘어오나. 쯧. 요즘 말로 내가 이병헌 빠순이였어요. 뭐 것도 다 옛날 얘기지만.. 그니까 <아름다운 그녀>, <번지점프를 하다>는 건드리지 말아줄래요. 분명 네이놈이 알려 준 영화 속 명대사 이런 걸로 알 테지."

“영화 봤는데.”

“2001년에 개봉한 영화였다고. 아~ 케이블 영화 채널에서? 하긴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작이니."

“케이블 채널에서 보면 안 되는 법이라도 있나? 극장에서 봤어요. 뭐 이런 걸 구구절절 설명해야 하는 건데."

어이없다는 듯 인범은 고개를 저었다.

“전체관람가였다 해도.. 에이 말도 안 돼.”

“말이 돼. 처자는 올해 몇 이신가?”

“밑도 끝도 없이 숙녀 나이는 묻고 그러신대.”

“설마 모르는 건 아니고. 왜 서른 넘으면 나이 세는 거 아니라며.”

의지와는 달리 정은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자기, 그 영화 몇 살 때 봤어?”

“중2 때 남자 친구랑 싸운 사촌 누나랑요.”

"해서 사랑도 조기 교육이 되던가요?"

"내 질문에 답 아직인데. 숙녀 나이 말고."

"나는 고2 때. 미리 자축하는 의미로다. 그해 여름 주민등록증 나왔거든."

넥타이까지 갖춘 정장 모습만 수 차례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한참 아래일 테지 생각했었는데 고작 세 살 차이였다니, 좁혀진 나이 탓에 반가움이 먼저여야 하는데도 이상한 기분이었다. 잔에 담긴 소주가 태평양만큼이나 끝없이 느껴졌다. '니 수영 실력 갖고는 어림도 없지.' 비웃기라도 하듯.. 순간, 덜컥 겁이 났다. 정은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주한 인범의 어깨는 더없이 편안해 보였다.


꽃망울을 터트리는 절기상 춘분인 3월 중순에 접어들었지만 해가 지면 쌀쌀해지는 탓에 주머니에 손을 넣거나 자연스레 두 팔을 감싸야만 했다. 어색한 분위기로 인해 평소보다 덜 마셔서일까? 차가운 기운이 몸에 훅- 들어오자 팔짱을 낀 양쪽 손에 힘을 가했다. '술자리와 잠자리는 가리라는 어른들 말씀을 이렇게 깨닫게 되는구나.' 정은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이었다.

“추워요? 벗어 줄 옷은 없는데.”

“박자 맞추고 있는 건데요.”

삼겹살 집 앞에 세워진 배달 오토바이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고개를 까딱이며 이를 몸소 증명하자 인범은 피식 웃었다. 반토막난 바람떡처럼 말이다.

“이리도 싱거운 사람인 줄은 몰랐네요. 이별 노래에 어떻게 웃음이 날까. 그러게 적당히 좀 드시지. 집도 코 앞이면서 사람을 기다리게 하고. 것도 둘씩이나. 여하튼."

목을 길게 빼고는 가게 안을 둘러보았으나 성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에 고개를 원위치하던 정은의 눈과 인범의 시선이 잠깐이지만 얽혔다.

“아니 왜 사람을 치고 그래요!!”

성은의 가벼운 터치였건만, 정은은 크게 으르렁댔다.

“고새를 못 참고 또. 인범이가 있어야 네가 편한 거야. 그러니까 잘해.”

“술 몇 잔에 취하시다니. 별로다.”

“됐고, 오늘 고생 많았어. 남은 시간은 푹 쉬고.”

“주 5일 근무자랑 주 6일 근무자랑 노동의 질이, 피곤의 수치가 같던가요? 정작 더 피곤한 사람 놔두고 굳이 또.."

“나이 먹은 유세 작작 좀 하고."

성은이 시원하게 비죽거렸다.

“나이도 많고 일도 많았던, 해서 피곤한 저는 이만.”

“방향도 같은데 같이 가.”

“일 없네요.”

휘영청 둥근 달님이 뒤를 밟는 듯했고, 누군가가 제 뒷모습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어, 이에 정은은 최대한 어깨를 펴고 빠른 걸음으로 당당히 걸었다. 잠깐이었지만 인범의 시선을 느꼈던 순간을 떠올렸다가 이내 지웠다. 어깨에 멘 가방 안을 뒤적거려 꺼낸 이어폰을 휴대폰에 연결해 양쪽 귀에 꽂으니 구불거리는 뇌 속은 금세 음악 소리로 가득해졌다. 보기 드물게 크고 밝은 달님이었다. 얄밉게도 말이다.


출입문과 커피숍 안을 번갈아 보며 홀로 분주한 정은이었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주중 오후 2시 이쪽저쪽을 틈타 나란히 들어와서는 잠시 엉덩이를 붙이는 날도, 그렇지 않은 날도 있는 서른을 갓 넘은 서너 살 터울이 지는 근처 건물의 영어학원 선생님들이었다. 특수고용직•프리랜서라 다른 직장인들처럼 개목줄은 없다만 턱밑까지 다가온 중간고사 기간임에, 평소라면 극구 사양하던 달달한 과자를 요 며칠은 덥석 받던 그 모습이 짠해서 조금 특별한 이벤트를 계획 중이었다. 출입문에 걸어 놓은 풍경이 맑은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드디어 작전 개시!!..

“더불어 사는 공동체 올해 안에 우리 모두 꼭 좋은 사람 만나길 염원하며 다 함께 불러 봅시다. Bruno Mars가 그를 대신해 고백하네요. Just The Way You Are.. 뮤직 스타트."

깊은 속사정까지는 몰라도 이제는 끼니 안부와, 삼십 대 만의 소소한 일상과 고민도 가끔 나누곤 했었기에, 까르르- 답장이 와야 하는 시점인데 이상했다. 종일 커피숍에서 일한 사람 퇴근하고서도 커피숍으로 불러낸 것 같은 센스 1도 없는 선곡이었던가? 노트북에 저장된 플레이 리스트에 시선을 고정한 채 성발라를 애타게 찾아보았지만 진성과 가성을 넘나들며 진실로 고백하는 Bruno Mars를 차마 외면할 수가 없어 얼굴에 미소를 띤 채 출입문을 향해 호기롭게 몸을 돌렸으나 이내 커다란 손을 이용해 벌어진 입을 다급히 가릴 뿐, '누가 땡 좀 해줘요.' 하듯 미동 없기는 인범도 마찬가지였다. 이와는 달리 Bruno Mars의 이국적인 음색과 인범 뒤에 선 학원 선생들의 웃음소리가 만들어 낸 화음이 커피숍 안에 가득했다. 그건 마치 솜사탕을 크게 한 입 맛본 어린아이의 세상 재미난 추임새와도 같았다.


'생각할수록 괘씸하단 말이지. 웃음보가 터지는 게 정상 아니냐고,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미동조차 없다니. 사람 맞냐고, 오해하는 건 아니겠지? 에이~ 오버다. 아니 또 모르지. 아~ 몰라. 관심 꺼. 신경 꺼. 생각 꺼.'

이는 나름 계획하고 준비했던 이벤트를 실패로 몰고 간 인범에 대한 원망의 표출이요 자신을 다잡는 정은의 단도리였다.


“안녕..”

“왜 인사를 하다 맙니까. 설마 오픈 전이라서?”

“아침부터 운수 꽝인가 봐요.”

“개시 손님한테 너무한다.”

“화투판과 장사의 공통점은 아는지. 첫 끗발이 8할이다. 해서 거른다는.. 왜!! 아직은 견딜만하니까요."

“첫 손님 그냥 가면 그날은 공치는 거 아닌가?”

“해서 뭐 드리냐고요. 손님!!”

대놓고 이빨을 드러내는 정은과는 달리 인범은 차분한 태도로 일관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라지 사이즈 하나랑 커피 들어간 것 중에 제일 달달한 거 뭐예요?”

“마끼아또나 카페모카요.”

“마끼아또 좋아하는구나. 먼저 말하는 거 보니. 것도 라지 사이즈로. 계산은 한 번에, 마끼아또는 이따가.."

“이따가 또 와요?”

“드시라고요. 당 떨어질 때.”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만 계산할게요.”

보란 듯이 가자미 눈을 한 정은이었다.

“참 재밌죠.”

“내 눈이 지금 재밌다 말하고 있나요? 센스도 없고, 눈치는 더 없고.”

“무슨?”

"가정의학과 가는 길 아니었나? 원장님 방금 올라가시던데. 내비게이션 업그레이드해야겠네."

“재밌나 봐요.”

“좀 전엔 평서문이고 지금은 의문문인가요? 뭐 그럭저럭요.”

잠자코 바라보는 인범의 시선을 정은 역시 외면하지 않았다.

“처음부터였으면 또 몰라. 사적으로 조금 안다고 비상등 끄는 거 싫다고요. 이래 보여도 여기 내 직장이에요. 여기서만큼은 나도 완벽하고 싶다고요. 별거 아닌 걸 별일 만드는 것도 잘하고."

왼쪽 검지에 낀 14K 링반지를 습관적으로 만지작거리며 짧은 숨을 내뱉고는 다시금 말을 이어갔다.

“이 무거운 분위기 어쩔 거야. 같이한 거니까 퉁치는 겁니다. 참고로 원장님은 따뜻한 카페라테 좋아하세요. 오늘 마수에 대한 답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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