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뉘엿한걸 보니 6시 이쪽저쪽이겠지 싶어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고는 씩- 웃었다. 한껏 치켜든 촉수를 앞세워 저녁 장사 운이나 떼어볼까. 아수라 발발타?? 출입문이 열리자 정은의 힘찬 목소리가 재생되었다.
“안녕하.. 세요."
“우리 왔다.”
저녁 장사의 첫 손님은 불륜 커플,, 이른 귀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벤이 부릅니다. 나는 아직 너와 열애 중.”
“부러우면 너도 하던가.”
핏- 성은이 콧방귀를 뀌었다.
“횡단보도 하나 건너면 초등학교 있어요. 스쿨존에선 안전 운전, 불륜 사절.”
“그만하고 커피 줘요. 그게 남는 장사일 텐데.”
얄밉게 말하는 인범을 향해 딱히 반박할 말이 없던 정은은 입을 닫았다.
“커피 팔아주러 부러 온 거야. 그렇지 자기.”
“길 건너에 별다방 있어요. 12시까지 영업하고 누워 있든 잠을 자든 직원이 상관을 안 해. 근데 우리 집은 내가 지켜보고 있다. cctv로 증거 확보하고, 불륜의 현장을 딱!!"
기도 안 찬다는 듯 성은은 웃었고 인범은 시선을 돌려 보란 듯이 정은을 외면했다.
“아메리카노 두 잔이랑 마실 음료 갖고 이리 와 앉아 보렴.”
“이래서 오늘도 휴게 음식점업계가 제자리걸음하고 있는 거야. 촌구석 읍내 다방에서도 안 그런단다. 앉아 봐??"
정은이 크고도 높은 목소리로 열변을 토했다.
“커피는 맛집인데 주인장이 별로라고, 이 바닥에 소문이 자자해.”
킥킥대며 성은은 인범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성은 옆에 앉아서는 팔짱을 낀 채 인범을 살피는 정은의 눈빛은 매서웠다.
“아직은 괜찮지만 커피숍을 나설 때 즈음이면 한쪽 다리에 힘이 없어질 테지. 등에 빨대 꽂혀 있던데.”
“애한테 못하는 말이 없다.”
“그렇다면 어른한테.. 직위 이용해서 애 후리고 다니는 쌤이 더 나쁘긴 해.”
“커피 마시러 온 거고 내가 연락한 거예요. 이 집은 사연을 말해야 커피를 마실 수 있나?"
정은이 가자미 눈을 하고 인범을 쏘아보았다.
"맛있게 드시고 담소 나누세요. 들..”
자리에서 일어나는 정은의 팔을 성은의 손이 재빨리 잡아챘다.
“그 담소 셋이서 같이.”
“이 분위기에서 무슨 얘기!!"
“계절이 계절인 만큼, 오다 보니 성질 급한 벚나무가 꽃을 피웠더랬죠.. 라든가.”
입에 든 커피를 뿜지 않으려는 성은의 노력은 성공했다.
“종일 홀짝거린 아메리카노 말고 퇴근 후엔 라테에 치즈케이크는 먹어야 하지 않나!! 저녁도 아직일 테고 부러 온 목적이 매출이 맞다면."
보란 듯이 정은이 입을 비죽거렸다.
“주거니 받거니 너네 그냥저냥 어울린다. 친하게 지내라고 좀.”
“엮지 좀 마요. 아줌마들 오지랖.”
“사귀어라 아닌 사이좋게 지내라는. 앞서 가지 말고.”
“앞에 말이나 뒤에 말이나 목적지는 결국 한 곳인걸 뭐. 오다가다 엮이는 거 싫다고요.. 같은 생각일 테고."
딱딱한 정은의 음성에 인범의 미간이 살짝 꿈틀거렸다.
“혹 불만 있어요?”
“아직은 아닌데, 이 대화의 끝은 그럴 것 같다는.”
순간, 잔잔했던 인범의 눈에 작은 불꽃이 튀었다.
천장에 박힌 형광등 불빛으로 버스 안은 대낮처럼 환했다. 그럼에도 정은의 기분은 무겁기만 했다. 까만 밤하늘의 면적이 버스보다 넓으니 당연한 결과일 테지.. 억지 이론을 대입시키며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도시의 밤은 아름답다 했는데 다 거짓말이었다. 빨간 신호등에 멈춰 선 버스 앞으로 손을 잡은 남녀가 건너고 있었다. 그때,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이 징- 울렸다. 성은이었다. 피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정은은 무거운 숨을 토해냈다.
“너도 참 피곤하게 산다."
“빙 두르지 말고 핵심만요.”
“일부러 찾아간 사람 면전에서 그러고 싶디!!”
그렇지. 이 시간에 전화한 목적은 ‘따져 물으리라'임을 알면서도, 숫돌에 갈았는지 바짝 날이 선 칼끝을 앞세워 다짜고짜 파고드는 것이 못내 서운한 정은이었지만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고 담담히 말을 건넸다.
“사춘기 청소년, 것도 둘씩이나 다독이며 사는 쌤이랑 같이 갔을 테니 별일이야 있겠어요.”
“너. 너는 진짜.. 생각지도 못하게 감정선이 탁- 튀는 그런 날일 거라고.. 자기는 괜찮다고 웃으며 가더라. 인범이가 훨씬 어른스럽다고."
‘동감입니다.’ 하듯 정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 듣고는 있어?”
“듣고 있습니다.”
귀는 듣고 있지만 두 눈은 창문에 두었다. 이렇게까지 여운을 남겼어야 했을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짜증이 고개를 쳐들었다. '이놈의 성질머리 하고는.' 엉켜버린 푸념을 뒤로하고 서둘러 말을 이었다.
“엄마 전화. 안 받으면 걱정하세요.”
엄마를 강제 소환해서라도 정은은 통화를 종료하고 싶었다.
“잘 들어갔는지 문자는 해.”
“번호 몰라요.”
“여태 왜?”
핸드폰 너머에 성은의 얼굴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번호 보낼 테니까 오늘이 가기 전에 꼭!!”
명령하듯 말하고 성은은 전화를 끊었다. 잠시 후 알림음과 함께 010 8703 4547 흰 바탕화면에 검은색 글씨가 새겨졌다. 이렇게 연락처를 알게 되는구나. 그는 왜 명함을 건네지 않았을까? 그의 연락처를 물어볼 기회는 수없이 많았는데? 아~ 김쌤이 있었으니? 답도 없는 질문들이 옥죄여 왔다. ‘혹 불만 있어요?’란 그의 물음에 ‘담배도 있지요!’라 싱겁게 받아쳤으면 성은의 전화는 물론 쓸데없는 감정의 소비도 없었을 텐데.. 여러모로 실패한 하루였다. 뭔가 생각난 듯 핸드폰에 초점을 맞추고 인터넷 검색창에 ‘대화의 기술’이라 적었다가 이내 지웠다. 성은의 말이 맞았다. 참 피곤하게도 살고 있다 생각하며 정은은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우유는 인당 두 개, 기계당 열여섯 개, 스팀 피처 여덟 개, 물주전자는 두 개가 필요한데 왜 한 개뿐인지?'
수업 시간이 임박해 오자 덩달아 마음도 조급해졌다. 당연 있어야 할 주전자가 보이지 않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성은이 업무를 보는 3층 사무실로 가기 위해 강의실 문 손잡이를 잡고 채 돌리기도 전 문이 열렸다. 이내 정은의 두 눈에 주전자를 들고 선 인범의 모습이 틈 없이 들어찼다. 반가운 건 주전자고 어색한 건 인범이겠지 아니면 그 반대이던가..
“가던 길 가요.”
한 발짝 옆으로 물러난 채 인범은 말했다.
“주전자 가지러 내려가던 중이었어요.”
“.. 아.”
“우유는 인당 두 개니까 마실 음료 빼고는 물 타서 스티밍 연습하는 거, 보아서도 해봐서도 알 테고, 중학교 때 살인배구 해봤죠? 운동장에 선 그을 때도 이거였는데. 해서 반갑더라고. 여러모로 쓰임새도 많지."
인범의 손에 들린 커다란 양은 주전자를 가리키며 안 해도 될 말까지 굳이 하는 걸 보면 정은 역시도 어색한 모양이었다.
“시모넬리 아피아는 스팀 레버를 잡아당겨서 편하긴 한데 압이 좀 약하고, 페마 E98 이 녀석은 돌리는 불편함은 있지만 스팀 압은 안정적이란 말이지. 나 처음 일하던 매장은 란실리오 클라세 3그룹이었는데 완전 벨벳 거품. 몸체가 커서인지 보일러가 튼튼해서인지 아무튼 최고의 스팀 장인이었다는, 배기량 큰 차가 인기 있는 이유는 그 때문인가?"
“아무 말 안 해도 되는데.”
“.. 네?”
“애들 곧 올 테고 굳이 선수 치지 않아도 된다고요.”
“기계 소리만 가득해 괴괴하니 싫어서 그래요.”
“선곡은 내가 합니다.”
인범의 손에 쥐어진 핸드폰에서 경음악이 잔잔하게 흘러나오자 다소 편안해진 정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풍경 소리인가? 실로폰 소리 같기도 하고.”
“마음의 화를 삭이는 명상 음악입니다.”
“응? 대체 왜?”
“요 근래 화가 많아져서.. 누구 때문에.”
심드렁한 말투와는 달리 반짝이는 인범의 눈빛을 보고 짧은 숨을 내쉰 후 짐짓 밝은 투로 말을 이었다.
“별거 아닌 일 대단한 것처럼 포장했구먼. 그런 사람들 세상 많다니까요.”
피식 웃는 인범의 미소를 따라 정은의 마음 한구석이 누그러졌다. 삐죽하게 던진 말에 동그라미를 덧입혀 봉인하다니, 구구절절 곱씹을 만큼의 모진 말은 아니었다 해도 여간 불편했던 정은이었다. 해서 맞은 놈은 발 뻗고 자고 때린 놈은 새우잠을 잔다 했던가!!
“모른 척 넘어가줘서 고마워요.”
좁은 공간 안에 높낮이가 다른 정은과 인범의 웃음소리만 가득할 뿐, 침입자가 되기 싫은지 햇살마저도 창문 밖에 머물렀다.
정사각형의 교육장 안은 커피 머신과 씨름 중인 엘리트 그룹,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는 중독자 그룹, 수다 삼매경 중인 종달새 그룹, 이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정은과 인범, 성은으로 나뉘어 있었다. 스티밍 연습이 한창인 청바지에 하얀 면남방을 걸쳐 입은 여자아이를 정은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쁘네.”
"의외긴 한데. 저 정도면 모험해 볼 만하지.”
“안 바빠요? 번번이 이럴 거면 손수 교육하시지. 실력도 으뜸이신 분이.”
정은의 속마음이 툭- 터져 나왔다. 필터링도 없이 말이다.
“원장님하고 맨투맨 하기 싫어 올라온 거야. 말 나온 김에 자기 이상형은?”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 내린다고, 우리 김쌤이 평소 한이 많으셔서 즐겨 부르는 노래가 '한 많은 이 세상 약속한 님아~'.. 맞죠!! 정답지 제출 잘하라는."
'왜 저래.' 낄낄거리는 정은을 향한 인범의 시선이었다.
“연상 연하 안 따져요.”
"치마만 두르면 오케이??, 직업 특성상 오래 서 있어서 다리가 그다지..”
“재밌지."
성은의 손동작을 감지한 정은의 몸사위가 한 박자 빨랐다.
“말로는 나 못 이긴다니까. 하하.”
“별로던데. 댁도.”
“설마 지금 나한테 하는 그런 말?”
예상치 못한 인범의 공격에 정은의 입이 절로 열리자 성은의 얼굴은 고소미 과자 한 봉지는 해치운 듯했다. 정작 이 상황을 만든 당사자만 홀로 침착했다. 복수만이 능사려니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생각해 보자' 마음먹은 순간이었다.
“쉬는 시간이니 음악 들으면 안 될까요? 기계소리만 윙윙거려 삭막해서요.”
손에 쥔 핸드폰을 표 나게 흔들며 청유형 같은 명령문을 토해내는 영훈의 꿈은 뮤지션이라 했다. 주종은 힙합이라 하나, 또래들 사이 꽤나 인지도 있다 익히 들은 소문에 정은은 의심치 않고 순순히 응했다.
“그럴까.”
‘아직 끝난 게 아니야.'라 말하듯 정은이 입술을 달싹이자 '알겠다.'는 듯 인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Just The Way You Are', 분명 Bruno Mars의 매력적인 음색이었으나 정은의 얼굴 가득 당황한 빛이 역력했고, 조금 다르게 인범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자주 듣네.”
들릴 듯 말 듯 인범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목소리 좋고 그루브도 좋고.. 둠칫 둠칫 두둠칫.”
어깨를 들썩거리며 성은이 입을 열었다.
“i'm yours. 진짜 좋아해.”
"그 사람은 Jason Mraz. 그간 흘려들었는데 가사 해석은 최근에. 누구 덕분에."
어깨만으로는 모자랐는지 고개까지 까딱이는 성은 곁에서 검지로 테이블을 두드리는 인범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just the way you are, yeah-'로 끝이 나는 재생시간 3분 31초 후에나 상황이 종료될 듯했다. 안되겠다 싶은지 정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만하고 수업하자.”
"사연이 있으시군요."
"번지수 없는 문패 없듯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더냐. 쉬는 시간 줄인 만큼 일찍 끝내 줄게. 동의하는 사람 손!!”
이의를 제기하는 영훈에게 서둘러 대꾸하고 커피 머신을 향해 정은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자 흩어졌던 아이들도 하나둘 모여들었다. 그로 인해 교육장 안은 기계 돌아가는 소리로 다시금 분주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