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의 아니게 들키다

- 보통의 연애소설 -

by 슈크림빵

썰물처럼 아이들이 빠져나간 교육장에는 고무장갑을 낀 채 열심히 설거지 중인 정은과 포터 필터에 부착한 블라인드 바스켓에 세정제를 넣고 시모넬리 아피아의 그룹 헤드를 백 플러싱하는 인범뿐이었다.

“쉬는 날에도 고무장갑과 한 몸이라니.”

싱크대에 컵을 내동댕이치는 감정이 실린 정은의 행동에 인범은 적잖이 당황했다.

“그러다 깨지면, 바꾸던지.”

“머신 청소는 뭐가 다르다고.”

“그럼 다른 거 해볼래요?”

“예를 들면.”

“아까 하던 얘기라든지.”

인범의 두 눈이 장난스레 웃고 있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손가락에 힘을 실어 고무장갑에 맺힌 물기를 튕기고는 깔깔- 정은이 맑게 웃었다. 이에 인범은 얼굴의 물기를 쓱- 닦아 냈다.

“노래에 얽힌 슬픈 사연.”

“.. 아.”

얼굴을 돌려 개수대에 두 눈을 고정한 채 아랫입술을 잘근 씹어대는 정은을, 인범은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무슨 사연씩이나. 저번에 가게에서 음악도 돌아가는 상황도 들어서 대충은 알겠지만, 뒤따르던 여성들이 나 홀로 크리스마스는 싫다기에 단골손님을 향한 주인장의 소소한 이벤트였고 오늘은 싹둑 자르기라는. 자칫하다가 무도회장 될까 봐"

“주전자 반납은 그쪽이. 물장난에 대한 대가.”

“내 신체 폄하에 대한 보상은?”

“사실이잖아.”

어깨를 으쓱이며 피식 웃는 인범을 보니 분이 꼭두까지 차올랐다. 해서 속사포처럼 쏘아대고 싶었지만 현실은 씩씩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나쁜 놈이 전화받으시란다. 대관절 이 자의 죄목은 뭐길래 이리도 흉측하게 저장이 되었을꼬. 떼인 것이 물질이더냐 마음이더냐!!"

넋두리 같은 성은의 혼잣말이 끝나기도 전, 저벅저벅 발소리에 이어 교육장 안으로 인범이 들어왔다.

“신호는 가는데..”

물이 뚝뚝 떨어지는 고무장갑을 낀 채 정은이 내달렸지만 인범이 한 발 빨랐다. 여전히 울리고 있는 정은의 전화기와 인범을 번갈아 보던 성은의 낯빛은 하얗다 못해 푸르스름하게 질렸다.

“원래는 님- 자가 있었는데.. 어디 갔지?”

대충 만든 반달눈과 어색한 웃음으로 정은이 한바탕 억지를 부렸다.

“오는 길에 가져다 달라고 전화한 거였는데.. 내려와요.”

커피 머신 옆에 두었던 포켓 수첩을 챙겨 커다란 보폭으로 인범은 교육장을 나섰다.

“나쁜 놈이나 나쁜 놈 님이나.. 퍽이나.”

비상 상황이었다. 후다닥 고무장갑을 벗어 성은 앞에 내려놓고는 냉큼 휴대폰만 챙겨 쏜살같이 달렸다.

“뒷일을 부탁해요.”

정은의 다급한 목소리가 교육장 밖, 복도에 저렁거렸다.


생명띠를 착용했으니 안전할 테지. 이 순간 믿을 수 있는 건 안전벨트뿐이라며 어깨에 걸친 검은색 띠를 잡고 있는 손에 한껏 힘을 실었다. 목적지는 집 근처의 대형 마트, 교육장에 필요한 비품을 사기 위해서였다. 차 안에는 두 사람의 불규칙한 호흡 소리만이 난무했다. 교통 방송이라도 흘러나온다면 좋으련만, 일요일 늦은 오후라 뻔할 뻔 자라지만 아무렴 이보다는 낫겠지.. 마음의 화를 다스리는 명상 음악이 흘러나온다면,, ‘화’를 넘어선 ‘분노’ 단계라 플레이리스트에 아직인가?.. 차라리 눈싸움이라도 걸어오면 오히려 반갑겠다만 눈길은커녕 눈조차 마주치려 하지 않는 인범을 향해 플랜 B 작전을 꺼내 들었다.

“의사랑 약사 중에 누가 더 말이 안 통해요? 뭐 도토리 키재기일 테지만.”

인범을 향해 정은이 소리 없이 외쳤다. ‘마음의 문을 열어요. 똑똑똑..’

“가정의학과 원장님은 시골 출신이라 세상 순박하고, 약사님은 친해지면 농담도 곧잘 하시지. 자기는 아메리카노 아닌 코리아노라며 시럽 넣어달라고, 웃음 참느라 혼났네요. 근데 피부과 원장님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서울내기 깍쟁이라 에스프레소 도피오가 취향이려니 했더니 웬걸, 캐러멜 마끼아또 좋아하시더라.”

“안 내려요?”

안타깝게도 돌부처를 돌아 앉게 할 플랜 C는 없었다.

"아파트 정문이잖아요. 정작 마트는 아직이고.”

“내 깜냥은 여기까지라.”

하고 싶은 말뿐 아닌 해야 할 말도 있었지만 빠른 하차를 강요하는 인범에 의해 쫓겨나듯 정은은 도중하차했다. 앞좌석 문이 닫히자마자 부릉- 시동을 건 인범의 차는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기승전- 없이 덮어놓고 오해라니.. 울컥 억울함이 치밀었지만 더해봤자 변명이지 싶어 발길을 돌렸다.


성은에게서 전화가 온 건 인범에게 버림받은 지 1시간 20분 만이었다. 비품 정리차 교육장에 재등장했다는 정보를 전해왔다. 열린 문틈으로 들여다본 교육장 안에서 인범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준비해 온 핑곗거리가 제대로 먹히기를 바라며.. 하나, 둘, 셋. 쇼타임!!

“어, 여기 계셨네요?”

억지로 가쁜 숨을 내쉬며 정은은 호흡에 부채질을 해댔다.

“어쩐 일이야?”

받아치는 성은의 리액션도 그럴듯했다.

“만년필을 놓고 가서, 검은색인데 외형이 몽블랑이랑 비슷해. 첫 해외 출장 기념으로 우리 오빠가 선물한 거라서. 보신 분?"

“좌불안석도 모자라 시계만 보던 이유가 이거였네요.”

안타깝게도 핑곗거리는 불통이었다.

“무슨.. 학원 비품이고, 이거 엄연한 내 일인데 자기가 대신해 준 거잖아. 미안하고 고마워서 올라온 거고, 만년필 찾으러 왔다잖아. 맞지?"

'죽고 사는 것은 네 놈 하기에 달렸다.'는 식으로 선을 긋는 것도 모자라 성은은 손을 툭툭 털었다.

“네. 의문문이었어요. 여기 계셨네요,, 는.”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볼 뿐, 정작 인범은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인범의 반응을 이끌어 낼 한 방이 필요했다. 제 역할이라 여긴 성은이 입을 열었다.

“온 김에 손 보태지, 이건 명령문이야.”

“그럴까요. 그럼.”

“보다시피 만년필 여기엔 없어요. 정리 끝났으니 저는 가볼게요.”

“여러모로 고마워.”

“갈비찜 국물에 밥까지 비벼 먹었어요. 빈 그릇만 달랑 드려 손 부끄러웠는데..”

머쓱한 듯 인범은 이마를 만지작거렸고, 팽팽했던 공기는 인범의 행동으로 다소 누그러졌다. 그 찰나의 틈을 노려 성은은 정은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이대로 엎을 거야?'

“수원 왕갈비보다 훨씬 맛난 집 아는데 가는 길에 잠깐 들를래요?”

“어머 내 정신 좀 봐. 애들 아빠가 간만에 외식하자며 일찍 오라고 했는데.”

치고 빠지는 성은의 연기가 수준급이었다. 정은은 기대 가득한 눈빛을 하고 인범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런 날은 술을 한 잔 해야 하는 건데.”

검은색 액체가 담긴 인범의 소주잔을 가리키며 정은은 볼멘소리를 했다.

“신상 소주라 생각해요. 물론 건배도 할 거고, 모처럼 바쁜 월요일이라서."

큼지막한 갈비 한 점을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어 삼킨 인범은 소주잔에 담긴 콜라마저 단번에 들이켰다. 좀 전과는 달리 한결 편안해진 말투였다.

“뒤돌아서는 나라님도 욕 한다지만 눈앞에서 당하니 기분 별로였는데, 시간이 지나서일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 콜라가 절반뿐이네. 콜라가 반이나 있네.. 외모가 다르듯 생각도 같지 않을뿐더러, 무턱대고 강요할 수 없으니."

빈 소주잔에 콜라를 정확히 반만 채우며 이를 설명하는 인범의 입가에 쓴웃음이 스쳤다.

“그건.. 실은 나..”

묻고 싶은 말 대신 해명이 필요한 시점이기에 급히 생각을 정리한 정은은 늦추지 않았다.

"나쁜 놈이나 좋은 놈이나 나한테는 다 같은 놈이에요. 그렇지만 본의 아니게 미안하게 됐네요."

“본의 아니게는 무슨, 작정하고 그랬으면서. 안 들킬 수 있었는데 억울하다 싶겠네요.”

“말꼬리 잡고 늘어지는 남자 그다지 매력 없는데.”

“매력 어필하자고 마주하고 있는 건 아닐 텐데.”

빤히 보는 정은의 시선에 인범 역시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실로 팽팽했다. 공든 탑이 무너지는 건 한순간, 솟구치는 감정을 꾹 누르며 정은은 애써 담담한 척했다.

“여기까지만 하시죠. 아. 그래. 그 학원도 이번 생도 내가 선배니까. 나는 선배님 댁은 후배님.. 어때요? 동의하면 건배."

서둘러 정은이 술잔을 들었다. 건배를 생략한 채 인범이 소주잔을 입에 가져가는 찰나, 그의 손목에 걸친 메탈 시계를 움켜쥐고 반대쪽 손으로 재빨리 잔을 부딪치고, 입 안에 털어 넣은 소주의 쓴 뒷맛에 콧등을 찡그린 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팔을 뻗어 인범의 시야에 들어가도록 팔꿈치 안쪽을 테이블 가장자리에 얹고 비장한 톤으로 운을 떼었다.

“재방송 없으니까 잘 봐요. 오른쪽이 왼쪽보다 훨씬 튀어나온 거 보이죠?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그네에서 뛰어내리다 모래 바닥에 불시착하며 얻은 영광스러운 상처예요. 팔꿈치 뼈에 금이 가서 깁스했거든. 진짜 귀한 영상인데 인심 쓰는 겁니다. 호칭 정리한 기념으로다가. 하하.."

정은의 웃음소리에 거짓이 없었다. 인범의 두 눈이 그녀의 오른쪽 팔꿈치에 한참을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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