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일 도우미로 명 받았습니다. 충성!! 막상 안 보이니까 서운하고 그러지.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란다. 이 어리석은 중생아."
“개똥도 약에 쓰려니 없네, 하던 참이었는데.”
“너 나쁜 놈 사건 때 쓴 반성문에 잉크도 아직 안 말랐다. 이럼 내가 또.”
“해서 쌤 자기 어디 간 건데요. 불타는 토요일 유후~ 후유증은 아니고?”
“워크숍 갔단다.”
“일요일에 워크숍은 무슨.. 차라리 집안 상중이라는 게 설득력 있어 보인다는.. 참.”
어이가 없다는 듯 정은은 혀를 끌끌 찼다.
“금, 토, 일 워크숍 갔다가 오늘 저녁에 온다더라. 월요일인 내일이 부처님 오신 날인 건 알 테지."
“불교 신자였구나. 어쩐지 낯빛이 심히 불경스럽더라니.”
벌어진 성은의 입이 닫히는 방법을 잊어버린 듯했다.
“나한테는 그런 말 없었는데.”
“이런 너한테 무슨 말을 하리.”
“말 안 한 당사자나 이제야 전하는 대변인이나. 진짜.."
건너 들어서인지 아님 인범의 부재 때문인지, 교육장 안의 공기가 돌연 낯설게 느껴지자 정은은 짧은 숨을 내쉬었다.
저녁이 되니 바람이 제법이었다. 출입문 위에 매달은 어닝 끝자락이 심하게 흔들리자 사태를 수습하러 밖으로 나갔다. 접이식 어닝의 기어 고리에 핸들의 갈고리를 걸어 시계 반대 방향으로 연신 돌려 벽면에 고정된 브래킷 쪽으로 최대한 접고서는 그제야 제멋대로 흩날린 머리카락을 감싸 쥐었다.
“정확히 스물한 번.”
인범의 목소리였다.
“뭐예요.”
“어닝 접는 모습 지켜보고 있었지.”
“말장난이 하고 싶은 거지.”
“바람 부는 날엔 커피숍에 가는 거니까.”
“술 마신 날이겠지.”
“티 나요?”
“냄새도 나요.”
“바람에 냄새도 날릴 겸 잠깐 있다 들어갈래요?”
어둠 때문이었을까 아님 한잔 걸친 탓에 느슨해진 인범의 태도 때문이었을까.. 밤의 무거움에, 마주한 인범이 내뿜는 분위기까지 더해져 어지간히 어색했나 보다. 익숙한 공간으로, 정은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근처에서 밥 먹고 커피 마시러 왔지. 아는 선배가 저 너머에 살아요. 주차 중이라. 소주 반 병에 주사 없으니 얼굴 풀어요."
겁난다는 듯 인범은 말했다.
“원했던 답은 그게 아닌데. 워크숍 얘기 난 몰랐잖아요."
정은이 빤히 바라보자 인범도 피하지 않았다.
“애당초 워크숍 잘 다녀왔냐고 물으면 좋았잖아. 그럼 평소 엄홍길 대장님을 존경하는 사장님을 따라 한라산에 다녀왔고, 똥돼지 구이는 기대치에 못 미쳤으며, 흐드러진 유채꽃과 신혼부부들을 밟히게 보았고, 바람은 심했지만 비가 안 와서 그럭저럭 괜찮았다는,, 굳이 짚고 넘어갈 일인가?"
“별일 아닌 걸 또 별일 만들었네요. 내가.”
출입문이 열리고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들어오자 두 사람의 대화는 끊어졌다. 이런 끝을 바라고 운을 뗀 건 아니었다. 멈춰 버린 대화의 끝에 남겨진 여운으로 인해 복잡해진 정은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 보이는 인범을 묵묵히 바라만 보았다.
4층 교육장 안, 그라인더 세팅을 마친 정은은 분쇄된 원두 가루를 포터 필터에 담아 적당한 힘을 실어 탬핑한 후 곧바로 그룹 헤드에 장착하고서 추출되는 시간과 양을 체크했다. 시모넬리 아피아의 스팀 레버를 잡아당기니 칙- 소리와 함께 스팀이 고르게 분사되었다. 이에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고 스팀 레버를 원위치시켰다. 빠진 게 없는지 교육장 안을 둘러보다 건너편, 아파트 담장을 끼고 이어진 아직 벚꽃이 달린 나무가 그저 신기했다. 창문을 열자 5월 초입임에도 후끈한 바람이 느껴졌다. 상체를 구부린 채 가만히 눈을 감았다.
“빨간 날은 쉬어가는 날이지 죽는 날 아니다.”
“건물주한테 원한 없어요.”
“뭔데?”
정은의 손끝이 멈춘 곳에 닿은 성은의 두 눈은 맑게 웃었다.
“한창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쁘네. 참 유채꽃은 어떻디?”
“노랗고 많고 사람들로 북적대고.”
한 발자국 떨어진 채 인범은 덤덤하게 말했다.
“드릴 거 있어요.”
쇼핑백 안에 손을 넣은 인범이 꺼내 놓은 건 감귤 초콜릿과 제주도의 풍경을 담은 여러 장의 엽서였다. 한 장, 또 한 장 엽서를 넘길 때마다 성은의 입꼬리도 올라갔다.
“사진으로도 제주도는 참 좋다.”
“싸우지도 서운하지도 말라고 선물은 동일하게, 두 분 앞에서 오픈한 거예요. 물론 그럴 분들은 아니지만."
멋쩍은 듯 인범은 말끝을 흐렸고, 정은은 비닐을 벗긴 초콜릿을 입 안에 넣고 오물오물 씹었다.
“음. 맛있어. 나 이거 좋아해서 편의점에서 먹어 봤는데 영 맛이 아니더라고. 해서 원산지, 특산품 하는 건가?"
“선물 앞에 장사 없다고. 자기 안 온 날 얘가 어떻게 했냐면. 음성 녹음 기능이 탑재된 CCTV의 보급이 시급하다고 본다. 나는."
"그건, 캡스에 문의하시고. 안 내려가세요?"
인범이 피식 웃었다. 다행이라는 듯 정은도 나지막하게 숨을 내쉬었다.
"안 탈 거면 버튼 좀 눌러 줄래요. 보다시피 남는 손이 없어서."
3층에서 잠시 멈췄던 엘리베이터는 1층으로 향했고 두 손 가득 들린 책이 버거웠는지 가장자리 안전바에 어정쩡하게 몸을 기댄 정은을 향해 인범은 무심하게 말을 건넸다.
“기다려요.”
엘리베이터의 열린 문 사이로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인범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사이 문이 닫히자 재빨리 열림 버튼을 누르고는 종종걸음으로 건물 밖으로 향했다. 인범의 자동차 뒷좌석에 책을 내려놓고 앞자리에 엉덩이를 단단히 붙인 다음 안전벨트까지 야무지게 채웠다.
“대중교통은 뒷자리에 자가용은 앞자리에.”
“누가 뭐랬나. 슬슬 정리하는 겁니까?”
뒷좌석에 쌓여 있는 커피 잡지를 곁눈질한 인범이 물었다.
“힘들게 가져왔더니만 괜한 짓 한 것만 같아. 달에 한 번 발간되는 잡지 기다리며 설레었는데, 나는 업이고 애들은 취미라 그런가?"
핏- 웃고 나서 창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 정은은 말했다.
“고마워요.”
“오늘의 메뉴가 그 동네라.”
“뭔데요?”
“닭갈비.”
“편의점 옆에 그 집?”
“아는구나.”
모처럼 만에 눈이 마주치자 두 사람은 동시에 웃었다.
“일행 없으면 합석해도 돼요?”
본격적인 저녁 시간 전인데도 크지 않은 가게 안은 둘, 셋씩 모여 앉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사람들의 온기와 커다란 주물 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까지 더해져 매콤하고 훈훈했다.
“걸쳐요. 흰옷이잖아.”
인범이 주황색 앞치마를 건넸다.
“흰옷이면서. 후배님도.”
“앞치마가 한 개뿐이라서. 난 오늘 세탁할 거고.”
“누구는.”
“메뉴에 있는 것 외엔 서빙 안 해줘서. 음식은 통인데 서비스는 불통이라. 저, 저 너머에 그런 집 또 아는데. 커피숍."
정은의 가슴팍에 단단히 고정된 주황색 앞치마를 가리키며 씽긋 웃고서 인범은 고개를 돌렸다. 그가 미워질 타이밍인데 그렇지가 않았다. 이상했다. 그새 편해진 건가?
몇 번을 생각해 봐도 억울했다. 기계 청소에 설거지에 교육장 청소까지 끝마쳐야 오늘 일과가 마무리될 테니 말이다. 할 일은 산더미건만 인범이 사라졌다. 해서 주객이 전도된 셈, 일 복 많은 것도 팔자려니 애써 위로도 해 보았지만 도통 나아지지 않았다. 죽일까!! 정은의 마음은 의문문이 아닌 명령문이었다.
“쉬는 날까지 고무장갑 끼게 한 건 미안한데 학원 비품이야. 원장님 평소 성품 아는 너니까, 살살해라. 근데 인범이는?"
“he is gone.”
“설마!!”
“덩치나 작아. 에이 나쁜 자식, 못된 자식.”
“남의 집 귀한 아들이야. 말 좀 가려서 하자.”
성은의 공격이 있을 시점인 건 눈치챘지만 등을 지고 있던 탓에 정은은 한 박자 늦었다.
“두꺼비 같은 그 손으로 내 등짝 그만 때려요. 우리 집에선 나도 귀한 딸이에요. 우리 엄마 알면 무사하지 못한다고. 소싯적에 배구 선수였어요. 스파이크 빡!!"
정은이 고무장갑을 낀 채 두 손을 허공에 대고 마구 휘둘러댔다.
“벌레 들어왔어요? 창문은 닫혀 있는데.”
교육장 안으로 들어온 인범이 정은을 보며 태연하게 물었다.
“가면 간다 오면 온다, 입은 장식품인지?”
“차 빼 달라고 해서, 문자 보냈는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
대놓고 인범을 감싸는 성은을 향해.
“편들기는.”
정은은 비죽거렸다. 그러나 상관없다는 듯 인범은 구석에 있던 청소기를 들어 파워 버튼을 눌렀다. 윙- 청소기 소음과 촤악- 물소리 위로 성은의 목소리가 덧입혀졌다.
“내 정신 좀 봐. 교육 때 필요한 물품 목록 적어주라. 비품 주문할 때 발주 넣게.”
수도꼭지를 잠그고 몸을 돌려 성은에게 시선을 맞추며 정은은 말했다.
“여섯 번째 수업은 색다른 거 해보면 어때요?”
“이를테면.”
“베이킹 수업.. 쿠키 만드는 건 유튜브나 블로그 통해서 익숙하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커피랑 짝꿍이고,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다과회 겸, 여러모로 좋지 않을까 해서요. 재능은 물론 물질도 기부할 의사 있고요. 원장님이 걸림돌이긴 한데, 좋아하는 애들 얼굴이 더 크게 그려져서요.. 어려운 부탁이지만 힘 좀 써주시죠."
“기특하네. 최대한 애써 보마. 레시피랑 필요한 목록은 미리 알려주고.”
“레시피는 보내고 목록은 영수증으로 대신할게요. 원장님과의 맨투맨은 사양할 테니 뒷말 안 돌게 확실히 매듭지어 주세요."
“오냐. 그건 그렇고. 내 말이 맞지?"
성은의 눈이 인범을 향했지만 그는 묻는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
"무슨요?"
"EX 남자 친구의 꿈을 대신하는 거라는.. 정은이가 커피에 입문한 계기. 험담 아닌 공개 프로필 전한 거야."
인범과 정은을 번갈아 보며 성은은 단도리를 확실하게 했다.
"감칠맛은 좋은데 조미료가 너무 들어갔다. 여하튼 손 큰 거는 알아줘야 해."
"명함 돌리는 게 좋아서 인범이는 제약회사 들어갔단다."
"어디 그 실력 한번 봄세."
'누굴 바보로 알아.' 보란 듯이 쐐기를 박는 정은이었다.
"맞다. 명함 왜 아직인 건데?"
성은의 두 눈은 물음표였다.
"갱년기 여성을 위한 신약은 아직 연구 중이라.."
휘몰아치는 성은의 웃음소리가 교육장 안을 빈틈없이 점령했다.
"나무 말고 숲을 봐야죠. 대놓고 일타쌍피. 치사한데."
성은의 손등을 찰싹 때린 정은이 치뜬 눈으로 인범을 바라보자 지지 않으려는 듯 그도 눈썹을 추켜올렸다.
"명함 하니까 생각났다. 내가 준 거 갖고는 있어요?"
".. 아. 그게.. 잃어버렸어요."
크리스마스를 코 앞에 둔 한 해의 끝자락이었다. 평소의 루틴과는 달리 한참 시간을 들여 의자에 붙였던 엉덩이를 뗀 인범은 빈 잔 대신 찢어진 종이 조각을 건넸었다. 종이 조각들을 맞추고 보니 그와 보험회사,, 두 장의 명함이었다. 새해의 첫머리, 다시 만난 그에게 스카치테이프를 덧대어 복원에 성공한 명함을 돌려주었다. 이미 제 손을 떠난 것이고, 버린 것이 아닌 잃어버린 거라지만 그럼에도 못내 서운하기만 했다. 물어볼 마음도 기회도 많았으나 쉬이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던 건 이런 끝을 알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순간,, 푸후- 정은의 마음 깊은 곳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