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축구

- 축구는 여름이 제철이다 -

by 슈크림빵

지금은 눈만 돌리면 찾을 수 있는, 해서 골라 가는 커피숍이지만 귀하신 몸값 자랑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라떼에는 말이야~,, 분명 그랬던 적이 있었습니다. 키오스크의 터치스크린보다 자판기의 보당(?버튼)을 누르며 손끝에 전해지는 터치감을 선호하고 그리워하는,, 켜켜이 둘러진 나이테 셈하는 것을 접어두었으니까요.


천 원짜리 지폐를 호기롭게 삼킨 자판기는 이내 묵직한 퉁- 소리와 함께 파란색 외관의 레쓰비를 뱉어 냅니다.

뽁- 소리를 내는 병따개와는 달리 음료의 캔따개를 젖히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음의 파동은 묘한 쾌감을 불러옵니다. 미꾸라지가 잔뜩 헤집어 놓은 듯한 흙탕물 색깔의 단물을 홀짝거리며,, 'danger(단거)는 we are the world구먼, 서양 문물 별거 아니구먼.' 피식거리며 괜스레 거들먹도 했더랬죠. 물론 신문물인 아메리카노를 접하고는 이마를 쳤던 기억도 분명하지만 말입니다.


커피숍의 성수기를 두고 의견들이 분분한데, 제빙기가 쉼 없이 돌아가는 여름철이라고 종사자의 입장에서 자신 있게 말씀드립니다. 메뚜기만 여름이 한철이 아니란 말이지요. 라떼에는 말입니다~, 캔음료가 들려있던 손에 지금은 테이크아웃 컵을 야무지게 쥐고 있으니까요. 교복을 입은 학생들부터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에 이르기까지 약속이라도 한 듯 손에 손에 쥐어진 아이스 음료,, 해서 제빙기는 연신 투명한 얼음을 뱉고 또 뱉어 냅니다.


컵에 얼음을 넣다 보면 하나 둘 혹은 여러 개를 흘릴 때가 있습니다. 바닥에 너저분하게 널린 얼음들을 하나하나 줍다 보면 허리며 팔다리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닙니다. 그렇게 얼음 축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원하는 코스를 향해 각도를 잡은 후에 한 번에 정확히 슈팅을 합니다. 그리하여 한 곳에 모아진 얼음은 일제히 수거합니다. 해가 바뀔 때마다 축구 실력도 상승하게 됩니다. 역시 땀과 노력은 배반하지 않습니다.

코로나의 여파로 매장 내 취식이 금지되었을 때, 매출은 하락세였지만 To Go의 비중이 현저히 높아져 얼음 축구 실력이 때아니게 빛을 발휘했었죠. 지금은 웃으며 얘기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앞이 깜깜했더랬죠.


성큼 가을이 다가왔습니다. 제빙기는 오늘도 열일을 하고 있지만 서운한 감정이 앞서는 건 왜인지 모르겠습니다. 아쉬운 마음을 아는지 때아닌 늦더위가 요 며칠 이어지니 그냥도, 시럽을 넣어도 제맛인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절찬리에 판매되고 있습니다.


가을의 문턱에서 다시 만난 여름의 끝자락,, 혼신을 힘을 담아 얼음 축구를 하며 올여름과 제대로 된 작별 인사를 하렵니다.




우리나라 커피 역사도 100년을 넘기고 있습니다. 공식적으로 우리나라 사람 중에 처음 커피를 접하고 마신 사람은 고종 황제입니다. 이는 역사적 기록에 근거한 것이며, 비공식적으로의 그 누군가가 먼저였을지도 모릅니다. <고종순종실록>에 의하면 커피를 '가배차'라고 기록하고 있고, '가배'라는 말은 '커피'를 음차해서 적은 것입니다.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암살되며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고,, 이를 <아관파천>이라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공사인 베베르가 소개한 '가베'를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영어 등 4개 국어에 능통한 독일계 러시아인 손탁 여사가 시중들었다 전해지며, 당시에 '가베'는 각설탕 속에 커피 가루를 넣은 것으로 그대로 뜨거운 물을 넣고 저어 마시는 것이었는데,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고종은 이 달콤한 쓴맛에 상당히 매료되었다 전해집니다. 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덕수궁 내의 동북쪽 경치 좋은 곳에 <정관헌>, 우리나라 최초의 '양관'을 짓게 합니다. 로마네스크풍의 이 건물은 고종의 개인 카페라 알려졌으며, 이곳에서 고종은 대신들과 함께 서양 고전 음악을 들으며 다과를 즐겼다고 합니다.


1902년 10월 서울 중구 정동 29번지에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 들어서는데, 이 건물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카페로 알려진 손탁호텔입니다. 러시아 공사관 생활의 고마움을 표하는 고종 황제의 답례였다고 전해지는데, 손탁호텔은 총 2층짜리 러시아식 건물로 2층은 주로 대한제국을 방문하는 외국 귀빈들이 묵었으며, 1층엔 '정동구락부'라 불리는 카페가 문을 엽니다.


고종 황제와의 연을 이어가던 손탁 여사는 1909년 러시아가 러일전쟁에 패하고 을사조약이 체결되며 프랑스로 돌아가기 전에 프랑스인 호텔업자 보에르에게 손탁호텔을 매각합니다. 1917년에 이화학당에 매입된 호텔은 기숙사로 쓰이다가 철거되고, 1923년 타계한 프라이 선생을 기념하는 프라이 홀로 신축되지만 1975년에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는 터만 남아 있습니다.


*룰루 프라이 - 1893년에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되었고, 1907년에 이화학당의 당장을 역임.


매거진의 이전글후천적 결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