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moments_1

- 함께였던 그 모든 순간들 -

by 슈크림빵


걷다가 마주치는 모든 것에 의미가 있다.

아니,, 스쳐 지나갔던 그것들 역시 의미가 있다.

지나쳤던 그러나 마주친 순간,, 부정할 수 없는 운명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베키오 광장과 맞붙어 있는 시뇨리아 광장, 흔히 '포세이돈'으로 알고 있는 이탈리아 조각가 바르톨로메오 암마나티(Bartolomeo Ammannati)가 조각한 바다의 신 '넵튠 분수' 앞은 여느 날처럼 붐비고 있었다. 네모난 시뇨리아 광장 구석에 이제 막 발을 디딘 진호의 두 귀는 허우적대는 눈동자 따윈 상관없는 듯 '넵튠 분수' 앞, 연미복 차림의 남녀에게로 향해 있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그래.. 잠깐만."

캡모자의 멀쩡한 챙을 괜히 매만지며 커다란 보폭으로 광장을 질러 걸으니 피아노 건반을 어루만지는, 바이올린 활과 줄다리기하는, 커다란 첼로와 한몸인, 하여 그녀들이 뽑아내는 선율을 갖고 노는 그들 각각의 음색과 마주하자 자연스레 입꼬리가 올라갔다. 더 테너즈의 'love will never end',, 머릿속에 재생되는 악보, 입에 익은 곡이었다. 훗- 새어 나오는 웃음을 삼키려 돌린 진호의 시선은 정면에 선 여자의 엉덩이에 걸쳐진 손을 포착했다. 동양 여자와 시커먼 손은 생경스런 조합, 물론 남녀 사이는 당사자들의 문제라지만, 그럼에도 시선을 붙잡는 건, 같은 피부색이라서?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릴 때가 아니었지만, 다급한 마음을 눈치챘는지 두 발은 진즉에 시동을 걸었다.

"what are you doing now!!"

영단어는 다행히 짝을 찾았지만 호기롭게 들이민 의도는 오답이었다. 까만 손과 연결된 조그만 소년은 커다란 눈을 한 채 진호를 빤히 바라봤고, 그려봤던 예문과는 별개인 여섯 개의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자 그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sorry."

부연 설명을 하고픈 마음은 간절했으나 정작 입은 단발로 그쳤다.

"혹 한국 분?"

"네. 뒤에 선 흑인 남성과 박수 치는 그쪽만 봤지. 가려진 아이는 보지 못했네요."

"그러니까. 추행하는 줄도 모르고 박수만 치는 아둔한 동포? 뭐 이런?"

"정작 꼬인 건 난데 그쪽 말투는 왜 꽈배기인지."

"훗."

웃음을 삼키기는커녕 툭- 던지는 예상치 못한 그녀의 반응에 진호의 눈썹이 급하게 올라갔다.

"아무리 'love will never end'가 좋다 한들.. 그리고 저 곡의 엔딩 요정은 따로 있어서. 어쨌든 마음만은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인사받자고 한 거 아니니, 그럼 이만."

진호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지만 곁에 선 사람을 미처 피하지 못해 제자리에서 휘청거리며 자신의 발을 밟았고, 이에 운동화 끈이 풀어지는 바람에 자세를 낮춰 신발끈을 묶고 일어나려다 그만 스치고 지나가는 이의 손에 걸려 모자가 땅에 떨어졌다. 떨어진 모자를 주워 대충 털며 허리를 펴니 낯선 사람들뿐이었다. 시뇨리아 광장 주변을 휙 둘러보았지만 4미터가 넘는 늠름한 넵튠상과 그 옆을 지키는 신들의 조각상뿐, 조금 전 여자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낮게 퉁퉁거리는 목소리가 진호의 심경을 대변했다.

"되는 일이 없구먼."

광장을 채 벗어나기 전, 힘없이 걷던 진호는 펼쳐진 종이 하나를 밟았다. 손을 아래로 뻗어 들어 올리니 편지봉투 크기였고, 그것을 뚫어져라 바라본 결과 내내 실주름으로 가득했던 미간은 금세 평온해졌다. 힘을 가해 종이를 움켜쥔 진호는 몸을 날쌔게 움직여 베키오 궁 주변, 응집해 있는 인파 속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Hostel Archi Rossi 간판 옆,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벗겨진 건물 외관에 등을 붙인 채 인기척에 따라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가며 확인하던 진호의 눈이 순간 반짝했다.

buongiorno.”

상냥하게 인사를 건넸지만 불통이었다.

“저기요. 거기 아가씨.”

“저요?”

“네. 우리 말고 또 누가 있다고.”

“한국 분인 건 알겠는데, 무슨 용건이신지.”

“대충 말고 제대로 보면 알 텐데. 어제 시뇨리아 광장에서.”

그제서야 두 사람의 시선이 엉켰다.

“아. 네. 같은 호스텔인지는 몰랐네요. 뭐 워낙 평이 좋아서.”

여자의 밋밋한 태도에 보일 듯 말 듯 웃은 진호는 주머니를 뒤적거려 반으로 접힌 종이를 꺼내 들고서 보란 듯이 흔들어댔다.

“뒤에 선 흑인 소년이 노린 건 현금, 쓸모없는 기차표는 바닥에 버리고 공연 감상하는 관광객 행세를 한 거지. 결국 나의 의심이 적중했고 내 행동이 옳았다는.. 안 그래요. 고아라 씨?"

진호가 쥐고 있는 기차표를 휙- 뺏어 들고 앞뒤로 확인한 아라의 눈과 입은 동시에 벌어졌지만, 상대의 사정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진호의 입꼬리는 잔망스럽게 올라갔다.

“책갈피로 꽂아두었는데 분명, 아~ 시간 확인 차 꺼내고는 주머니에 급히 넣었었지. 노래에 정신이 팔려서 그만.."

기억을 되돌리는 아라의 말투에는 후회가 가득 담겨 있었고, 아쉬움은 얼굴을 가득 메웠다.

“행운의 편지만큼이나 중독성이 있더라는. 훔치거나 돌려주지 않으면 삼 년간 재수 없다는데, 그건 좀 겁이 나서, 결론적으로 보면 호스텔 주소 적어둔 거는 잘한 듯."

“그냥 장난으로 한 건데. 이렇게 될 줄은.. 아..”

'혹, 기차표를 잃어버린다면? 정의로운 누군가가 그것을 전해즐 수도 있다!!'라는 상황을 부러 가정하며, 기차표 뒷면에 숙소명과 자신의 이름을 적으며, 이를 훔치거나 주었음에도 돌려주지 않을 상황을 대비한 저주의 말까지 꼼꼼하게 덧붙였던 아라였다. 상상으로 그쳤어야 했건만, 현실이 된 상황에 아라는 꽤나 당황한 모습이었고, 말끝을 뭉개는 그 모습이 진호의 눈에 그저 측은했다. 대화가 오갈수록 구석으로 밀어붙이는 모양새만 같아 그로 인해 덩달아 가라앉는 듯해, 분위기를 전환시키고자 일부러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어쨌거나 찾았으면 된 거고, 삼 일 후 로마 갈 운명인 거지.”

“고맙습니다.”

“기차표 주고 인사도 받았으니 이만 갈게요.”

입은 호기롭게 말을 뱉었다만 발걸음 끝은 무겁게 땅을 짓눌렀다. 그런 진호의 뒷모습이 공기 중으로 흩어지기는커녕 아라의 두 눈에 아로새겨졌다.

“잠깐만요. 아침 전이죠? 기차표 22유로예요. 보답은 해야겠어서”

팔을 쭉-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에 선 두 사람의 시선은 오롯이 서로에게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