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께였던 그 모든 순간들 -
"후회하는 눈빛이네요.”
“피자에 콜라 아님 크로와상에 커피 덧붙여 피렌체 랜드마크, 깜냥 그 정도면 되겠다 싶었는데.”
“로마행 기차표 보고 솔직히 반가웠어요. 피렌체는 선행 학습했지만 로마는 깜깜해서요. 덩어리도 크고, 해서 동행을 제안해야지 했는데. 당찬 어제의 태도는 오간 데 없고 풀이 죽은 모습이라 번지수 틀렸구나 한 건데.”
“그 마음이 뒷모습에 남았어요. 말하는 내내 배낭을 꼭 쥐고 있던 어제의 모습이 보태어지는 바람에, 잘 가요~만 하기엔 영 탐탁지가 않아서, 모성애가 많아 여자라죠."
훗- 서둘러 웃음으로 마무리 짓는 아라를 진호의 시선은 말없이 좇았다.
“첫 여행 첫 여정인데, 소매치기당할 뻔했어요. 그러고 나니 정신이 바짝 나서.”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그 마음은 아플 테니. 잘하고 있다고요. 본디 신고식이란 짓궂어야 하는 법.. EOS 카메라를 삼각대에 걸어두고 잠시 고개 돌린 틈을 노려 카메라를 가져갔데요. 칼 든 강도와 대면한 이도 있고 잃어버린 것은 물론 다친데도 없으니, 미리 맞은 매라고 생각하면.”
“설마 다 본인 경험담은 아니죠?”
“처음은 누구에게나 설레고 떨리고 그에 못지않게 두려움 또한 커요. 저 사람들 엄청 여유로워 보이죠? 하지만 개중에는 머릿속에 내비게이션 무한 재생하고 있을 거라는. 나 역시도 그랬으니까. 그쪽에게만 오는 시련 아니니 피렌체 별로야~ 하고 지레 겁먹지 말라고요. 한 수 물리면 내내 후회할 거예요.”
아라의 말이 끝나자마자 진호는 배낭에서 꺼낸 지도를 나무 테이블 위에 펼쳤다.
"산타크로체 성당, 두오모 대성당은 외관만, 쿠폴라는 아직이고 시뇨리아 광장과 베키오 궁을 거쳐 미켈란젤로 언덕에 올라 석양 보고 질리에서 티라미수로 당 충전하고. 불안한 마음 쫓아내느라 정작 두 다리는 고생했지만.”
머쓱한지 진호는 머리를 긁적였고 이를 바라보는 아라의 눈빛은 경계심을 한 꺼풀 벗어던진 듯했다.
“합격!!”
“로마 동행?”
“애국 청년이란 말인데, 국내 서적 봤다는 거니. 피렌체의 수호성인을 가리는 산 조반니 축제인 6월 24일, 산타크로체 광장에서는 축구 경기가 열리고 미켈란젤로 광장에서는 폭죽 이벤트가 있다는 설명밖에 없길래, 미켈란젤로 언덕을 대하는 외국 사람 감정은 어떤가 찾아봤더니 론리플래닛은 그리 말하던데.”
하하- 호탕한 웃음으로 인해 진호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정신없이 움직여댔다.
"피렌체에 살았던 선배가 미리 귀띔해 준 거예요. 자타공인 석양 맛집이라고. 귀에 못이 박혀서. 두오모 성당의 쿠폴라, 미켈란젤로 언덕의 석양이면 피렌체 다 본 거라고.”
진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라의 두 눈은 심술궂게 커졌다.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 세 번째 방문인 내 관점은 좀 달라서요.”
“그럼 로마도?”
“그렇죠.”
아차 하는 표정의 아라와는 달리 진호의 입가에는 웃음이 머물렀다.
“세 번째 방문의 연유는 가면서 듣는 걸로 하고 계산은 내가 할게요.”
지체함이 없이 배낭과 계산서를 집어 들고는 빠른 걸음으로 카운터로 향하는 진호를 넋 놓고 바라보던 아라 역시 에코백을 들고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좁은 보폭으로 종종 걷는 아라의 뒷모습엔 다급함이 역력히 배어 있었다.
“공기마저 달콤한 파리, 세상 제일검인 석양을 가진 피렌체,, 굳이 큐피드의 화살이 필요 없을 도시.. 덧붙여,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부족한, 해서 초자연적인 무한대의 그것이 필요하다면 이곳으로,, 저런 멋진 석양을 바라보며 내민 손을 뿌리치진 못할 테니. 나라면 절대 못해, 혹여 그 누군가가 그런다면 억지 부리지 마요. 좋은 사람들하고 웃고 살기에도 바쁜 세상 구태여 억지 인연 만들 필요 없으니.”
“단정 짓는 이유는?”
“'널 좋아해'라는 고백이 '석양이 이쁘다'로 번역되어 상대의 귀에 맴돌 테니. 그게 피렌체 미켈란젤로 언덕에 걸린 절대 마법이니, 이 세상 끝나기 전까지 풀릴 수 없는 절대 마법.”
농담이라고 하기엔 진지한 아라의 말투에 진호는 물끄러미 시선을 두었다. 두 사람 사이에 맴돌던 정적을 깬 건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에 시선을 둔 아라였다.
“지금.”
아라의 외침에 자동 반사하듯 진호 역시 그녀의 시선과 같은 방향이었다.
“아름답다는 말밖에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사전에 기록된 최고의 감탄사입니다.”
종일 달아오른 태양은 한 걸음씩 내려앉으며 파란색의 하늘을 툭- 건드려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한껏 농염해진 해가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붉은색 쿠폴라 지붕과 엉키자 불타오르는 듯한 착각마저 일으켰다. 붉은색 드레스 자락을 쥐락펴락하는 원숙미 짙은 어느 무희의 춤사위처럼 환상적인 동시에 고혹적이기까지 했다. 마술사의 속임수 같은 눈앞의 모습에 두 사람은 매료된 듯 보였다.
“피자보다 석양이라더니,, 거짓말이 아니었네. 힘들어도 그 반대여도 위로가 되는 곳이라길래, 늘 유쾌한 사람이라 솔직히 반신반의했지. 석양 보고 결정하자 했는데..”
몸의 중심은 미켈란젤로 언덕 돌난간에, 두 눈은 아라에게 의지한 채 말하는 진호의 목소리는 스며들기 적당한 온도였고, 고개를 끄덕이며 아라는 부정하지 않았다.
“기차표 버릴 생각이었어요. 내 컨디션이 엉망인데 남 좋은 일은 쓸데없는 오지랖이니, 그런데 석양 보고 어지러운 마음과 생각을 다잡았어요. 내내 찜찜할 거 같아 자진 납세하는 겁니다.”
“그럴 수 있어요. 충분히. 나약한 인간의 한계가 버거울 때,, 피렌체에 걸린 절대 마법.. 맞죠?”
“그러네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주한 그들은 거짓 없이 웃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시뇨리아 광장은 분주했던 낮의 모습과는 달리 조금은 한적했고 한층 더 고즈넉했다. 건물 외벽의 전구는 스스로 몸을 태워 견고한 중세 시대의 멋을 한껏 뽐냈고, 먹색 하늘 아래에서 제 빛깔을 조금 잃기는 했지만 우뚝 솟은 두오모 대성당의 쿠폴라는 고개만 돌리면 어디서든 쉬이 눈에 띄었다. 마치 이정표처럼..
“작별 인사는 피차 하지 말기로.”
“응?”
“증명이 아직인지라. 평상시엔 온순하나 건드리면 무는 습성이라서요. 간신히 숨만 돌릴 스케줄일 테니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고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진호는 웃었다. 재빨리 등을 돌린 채 저만큼 걸어가던 아라가 손을 번쩍 들어 공중에서 휘저어댔다. 그런 아라의 뒷모습이 조그만 점으로 박힐 때까지 진호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현시점 기준으로 피렌체에서 제일 많이 본 것. 하나, 둘, 셋.”
말없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는 진호에게 미간에 부러 실주름을 만들어 아라는 대갚음을 하였다.
“석양?"
“시뇨리아 광장, 미켈란젤로 언덕, 셔틀버스, 여행책과 지도.”
“다비드?”
“빙고!! 이탈리아 국기 달린 평범한 외관의 건물 안에 엄청난 게 숨겨져 있어요. 늘어선 사람들은 보일 테고, 소문난 잔칫상 구경하러 가볼까요.”
줄줄이 늘어선 사람들을 따라 꼬리칸에 자리를 잡고 천천히 움직이며 아까데미아 미술관 내부에 발을 들여놓았다. 잠볼로냐의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 조각상을 지나 복도 끝을 따라가니 측면을 응시한 채 서 있는 다비드가 보였고, 걸음을 재촉하자 늠름한 청년의 모습이 두 눈에 아로새겨졌다. 조금 뒤쪽에서 보면 균형이 잘 잡힌 청년의 모습이나 가까이서 보면 오른팔과 돌을 쥐고 있는 손은 유난히 크고 하체 역시 상체에 비해 커다랗고 두둑하며 머리 역시 몸에 비해 다소 크게 느껴지는데, 이는 치밀한 계획하에 조각상의 각 부위를 크게 만들어 실제 눈에 보이는 것과 같이, 멀고 가까운 거리감이 드러나게 표현한 것으로, 5.5미터의 거대한 조각상 아래 옹기종기 모여있는 사람들의 눈과 입은 그저 놀람을 나타내고 있었다.
“대단하죠?”
“벌거벗은 모습이요?”
“5.17미터의 대리석 덩어리를 5.5미터의 조각상으로 만드는데 단, 삼 년 걸렸어요. 것도 26세의 나이에 말입니다.”
“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조각가는 조각을 하죠. 그게 일이니까.”
아라의 목소리도, 시선도 잔뜩 꼬여있었다. 아랑곳하지 않은 채 진호는 맞받아쳤다.
“눈만 돌리면 익숙한 광경이라. 아~ 크구나 외엔 그다지.”
“감춘 마음은 안 그럴 텐데. 아까데미아 국립미술관에 오는 목적은 다비드상인데, 뜻밖의 반응이라니."
“남자들은 목욕탕에서 주위 안 살펴요. 굳이 돈까지 내면서? 게다가 교회 오빠도 아닌지라.”
절로 벌어진 아라의 입이 닫히는 방법을 잊은 듯했다. 그녀와는 달리 진호는 다비드상 아래 북적이는 사람들을 훑고 또 훑었다.
피렌체 중앙시장의 Da Nerbone,, 일하는 사람이나 기다리는 사람이나 분주하기는 매한가지였다. 투명한 비닐을 벗겨 곱창 버거의 맛을 음미하던 진호는 빤히 자신을 보는 아라의 시선을 느꼈다.
“그럴 거면 줄 서던가.”
“고기 제쳐두고 하필이면 껍데기냐고~, 김주원 씨가 바른말했죠. 장기까지 씹어 먹을 털 난 양심은 아니라서.”
기도 안 찬다는 듯 고개를 돌리면서도 연신 입 운동을 멈추지 않는 진호를 궁금한 듯이 아라는 바라보았다. 양볼이 빵빵해질 대로 우걱우걱 씹어댄 후 진호는 어깨에 멘 배낭에서 콜라를 꺼내 벌컥- 들이켰다.
“소문대로군.”
“음식 가릴 거라 생각했는데. 체형 봐서는.”
“두 개는 거뜬하겠는걸.”
눈썹을 치켜올리며 시위하는 아라를 향해 진호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먼저 한 사람이 누구더라. 콜라가 제맛이라고. 도장 깨기로 퉁치는 거지. 뭐.”
쓱- 어깨를 올리며 입언저리에 일부러 웃음을 새기는 진호를 바라보는 아라의 두 눈은 사뭇 장난스러웠다. 적당히 얽혔던 시선이 제자리를 찾음과 동시에 중앙시장 건물을 박차고 나온 그들은 갖가지 가죽 제품들과 덩달아 사람들로 북적이는 비좁은 시장 골목으로 천천히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