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겁지겁 집을 뛰쳐나온 게 엊그제 같은데 1년 반의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허겁지겁 나왔다고는 했지만 순간적인 충동에서 나온 건 결코 아니었다.
오늘 이혼 수속을 밟으며 자료에 적혀 있는 결혼 날짜를 보았다. 24년간 부부라는 이름으로 꽁꽁 묶어두었던 매듭이 오늘 풀렸다.
집을 나오며 1년 후에 이혼하겠다고 생각했다. 별거는 이혼을 하기 위해 4 사람이 적응하는 기간이라 내 나름 정의를 내렸다. 1년이란 시간이 다가오면서 정리해야지 하면서도 감정 소모할 생각을 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를 만나 말을 섞을 자신이 나지 않았다. 내 마음의 평화를 깨트리고 싶지 않은 마음, 요동칠 감정의 소용돌이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지쳐왔다.
변호사에게 의뢰할까? 그러나 그건 최후의 방법이어야지 생각이 들었다.
문자로 말할까?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 말기를 반복. 그러는 동안 1년 반의 시간이 흘렀다.
5월은 대만에서 종합세 신고 기간이다. 부부가 따로 신고해도 되지만 인제 껏 우리 집은 신고를 같이 해왔으며 그 신고를 남편이 맡아왔다.
그래서 5월 중순에 작년 한 해 동안의 나의 수입과 세금 총액을 문자로 알리며 넌지시 던져 보았다. 내 의지라기보다 잠재의식의 발동이었다.
"종합세 같이 신고하는 건 이걸 마지막으로 하자. 내년부터는 따로따로."
"좋아."
왜냐고 안 묻길래 나는 이어 문자를 보냈다.
"우리 정리하자. 인제 껏 해왔던 대로 자녀 교육비 부담할 거고, 당신 명의의 재산은 하나도 요구하지 않을게."
"좋아."
너무 빨리 회신이 와서 순간 가슴이 먹먹해지는 자신을 보았다. 정신을 바로 차리고 나는 예전에 작성해 둔 이혼합의서를 열고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그에게 보냈다.
"내용 확인해 봐, 문제 있으면 수정할게."
"문제없어."
"그럼 내가 서명하고 우편으로 보낼 테니 서명한 후 戶政事務所(한국의 시청 안에 호구등록사무소)에서 만나 신청하자."
"알았어."
인제 껏 언제 말을 꺼낼까 수없이 고민했는데 이렇게 쉽게 순수히 응할 줄이야. 모든 일에는 때가 있나 보다. 때가 되니 저절로 정리가 되는가 보다.
줄곧 아이들 때문에 이혼은 안 된다고 했었던 그였다. 인젠 아이들이 다 커서 그 이유도 무색해져 버린 것일까? 1년 반 동안 아이들과 그의 관계는 좋게 유지되고 있어서 부자 관계에 안도해서일까?
대만에는 이혼합의서에 2명의 증인의 서명이 필요했다. 나는 내 사정을 아는 동료 교수에게 부탁했다. 동료는 내 이혼합의서를 훑어보고는 말했다.
"정말 이 조건으로 괜찮아요? 인제 껏 아이들 교육비며 생활비를 쓴 게 얼만데 재산을 조금도 요구 안 해요?"
"그 재산에 미련 가지면 정리하기 어려워요. 그거 안 받아도 살 수 있고요. 내게 가장 소중한 게 뭔지를 알았어요."
"남들은 자식을 위해서라도 챙기려고 해요. 재혼이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요?"
"재혼해서 행복하게 지내면 좋은 일이죠?"
"재산 다 재혼자에게 줘버리면 어떡해요?"
"그것까지 염려해요? 그건 그 사람 몫이고."
동료는 여기까지 말하고 더 이상 잇지 않고 서명해 주었다.
최근 [나는 보았습니다]의 저자인 전생을 리딩하는 박진여 선생님을 유튜브에서 알게 되었다. 지금껏 불서랑 죽음학 관련 책을 읽어왔던 터라 박진여 선생님의 리딩이 와닿았다.
가족의 인연, 부부의 인연은 우연히 맺어지는 게 아니라 한다. 특히 부부의 인연인 경우 전생, 혹은 전전생의 그 어떤 업보로 인해 그 과제를 풀려고 만난다고 한다.
내게 주어진 과제를 나는 다 풀었을까 자신에게 몇 번이고 질문했다. 좀 더 일찍 전생을 의식했더라면 덜 미워할걸... 박진여 선생님의 전생 리딩 사례들을 들으며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생각했다.
남겨진 과제를 풀기 위해 다시 과거의 생활로 돌아갈 수는 없다. 중생인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여력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그래서 나는 풀어야 할 과제를 내 방식대로 풀어나가려고 생각한다.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내 삶을 살며 두 아들을 보살피겠다고. 그리고 물려받은 그의 부모님 재산에 욕심을 내지 않겠다고. 멀리서 그가 행복하기를 바라며 살겠노라고.
대만의 합의이혼 절차는 매우 간단했다. 두 사람이 가서 이혼합의서를 제출하고 몇 서류에 서명하니 오늘 날자로 이혼이 성립된다고 했다. 다음에 또 안 와도 되냐고 재차 확인하는 내게 그렇다고 했다.
오늘 이혼 수속을 밟힌 후 그에게 건네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하지 못했다.
"외국인인 나와 사느라 당신 수고 많았어. 좋은 아내가 되고 싶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나는 당신에게 불편함, 부담을 주는 존재로 변해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어.
당신 덕에 대만에 와서 두 아들 낳고 좋은 일자리도 얻었지, 고마워.
건강 챙기며 행복하게 지내. 나 보란 듯 말이야.
그리고 우리 다음 생에는 만나지 말자. 나 이제 당신을 향해 미워하는 마음 내려놓을 거야. 이미 많이 내려놓았어. 그러니까 다음 생에 보답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도 돼.
남은 여생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 돼.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웃으며 인사를 건넬 수 있는 날이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