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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보 Sep 08. 2024

인생의 귀인, 은사님

나의 일본 유학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는 바로 하야쯔 에미코(早津惠美子) 지도교수님이시다. 일본 대학은 3학년이 되면 진로를 결정하고, 한 교수님의 제미(ゼミ)를 선택해 수강하며 4학년에 졸업 논문을 집필하게 되어 있다. 제미는 우리나라의 세미나와 비슷한 형태로, 3학년부터 2년 동안 교수님과 함께 관심 분야를 동료 학생들과 탐구하는 '학습 서클' 같은 수업 방식이다. 일본 특유의 이 방식은 학문적 깊이와 동료들과의 교류를 동시에 제공하는 귀한 기회였다.




나는 학부 3, 4학년의 2년, 석사 3년, 박사 3년, 총 8년 동안 하야쯔 교수님 아래에서 연구했다. 교수님은 나에게 연구의 즐거움을 깨닫게 해 주신 분이었다. 연구 주제 선정부터 진행 과정까지 학생들이 주도하도록 맡기시며, 스스로 연구에 몰입할 수 있도록 유도하셨다. 특히 석사 과정에서는 박사 과정 학생들과 함께 제미를 하며 선배들의 연구도 들을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배우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제미 수업은 각자 연구 내용을 발표하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는데, 나는 아직도 그 시간이 생생하다. 제미는 오후 4시 30분에 시작하여 원래 6시에 끝나야 했지만, 매번 9시 가까이 되어야 마무리되곤 했다. 7시가 넘으면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학생들이 집중력을 잃고 자꾸 시계를 보게 되지만, 교수님은 여전히 열정적으로 토론을 이어가셨다. 교수님의 연구 열정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었다.


교수님은 배고플 것을 염려해 간식을 준비해 오시곤 했다. 학생들 역시 간단한 간식을 가져오기도 했다. 제미가 끝나고 강의실을 나서면 캠퍼스는 이미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런 밤, 우리는 교수님과 함께 정문을 나서며 학교 근처 주점으로 향하곤 했다. 주점에 들어가시면 교수님은 자 "오늘은 딱 한잔만 해요"라고 말씀하셨지만, 이어지는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연구 이야기부터 일상사까지 모든 대화가 웃음과 함께 흐르며, 하루의 피로가 맥주 한잔과 함께 녹아내렸다. 전차 막차 시간이 다가올 때까지 이어진 그 시간들은 돌이켜 보면 너무나 소중한 추억이다.




내가 교수가 된 지금, 일본의 지도교수님을 흉내 내는 것조차 쉽지 않다는 걸 절감한다. 매주 제미를 운영하며 학생들에게 쏟은 열정은 연구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교수님은 슬하에 자녀는 없으셨지만, 길러낸 제자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교수님의 따뜻한 마음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다. 한 학부생의 자취방에 화재가 발생해 생활필수품이 모두 불에 타버렸을 때, 교수님은 그 학생을 위해 일일이 생활필수품을 사서 보내주셨다고 한다. 지도교수님 밑에서 8년을 지낸 나로선 전혀 놀랄 일이 아니었다. 유학생들을 생활면에서 따뜻하게 보살피고 학문적으로는 엄격하게 지도해 주신 분이셨다.




첫아이를 낳고 두세 달 후에 교수님을 찾아뵈었을 때가 박사 과정 3년째였다. 당시 일본어 문법 연구를 하던 선배들은 보통 5년에 학위 논문을 제출했고, 그 이상 걸리는 경우도 흔했다. 임신으로 연구에 온전히 몰입하지 못했던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교수님, 제가 열심히 하면 3년에 학위 논문을 제출할 수 있을까요?"
내 물음에 교수님은 망설임 없이 바로 말씀하셨다.
"경보 씨라면 가능해요."

그 말씀은 내게 평생 잊지 못할 큰 격려였다. 


다른 누군가가 당신을 믿는다면, 당신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들을 해낼 수 있다. (데일 카네기)


부족한 나를 믿어주시고 격려해 주신 덕분에, 나는 연구의 즐거움을 더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물론 피곤할 때도 많았지만, 연구는 내 삶의 역경을 잊게 해주는 존재였다. 학부 때보다 석사 과정이 더 좋았고, 석사 과정보다 박사 과정이 더 좋았다. 연구에 몰입할 때 나는 살아 있음을, 그리고 내가 살아갈 이유가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야쯔 교수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살아가며 몇 번의 귀인을 만난다고들 하는데, 그 교수님은 분명 내 인생의 귀인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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