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편 -4 모명재의 배롱꽃

대구의 하늘 기차

by 바람처럼

안개에 싸였던 아침이

햇살에 천천히 드러난다.

벌써 삼십 도에 가까운 기온.

오늘도 대프리카의 더위는 여전하다.


딸의 걸음이 점점 느려진다.

급한 마음을 숨기며

나는 보폭을 맞춰본다.


대구의 하늘 열차,

세계 모노레일의 표준이라는 하늘 열차에 올랐다.


창문 너머로 대구 시내가 펼쳐진다.

아파트 단지를 지날 때면

창밖은 커튼처럼 흐릿해졌다.

빌딩 숲 사이로 흐르는 바람처럼,

하늘은 더위와 무관한 듯 청량했다.

대봉교역에서 내려

김광석 거리로 향한다.

골목 투어로 유명한 곳이지만,

이른 시간 탓에 거리는 조용하고

카페 문도 닫혀 있다.


갈증을 호소하는 딸,

수박주스를 간절히 원한다.

사주고 싶었지만

굳게 닫힌 카페 문은 요지부동.

별 수 없이 생수를 내민다.

아쉬움이 얼굴에 드러나도

아이의 입꼬리는 살짝 올라간다.


김광석의 노래가

잔잔하게 골목길을 따라 흐른다.

위로처럼.


사진 찍기를 유독 싫어하는 아이에게

자꾸 포즈를 주문하다 보니

문득, 아이 얼굴이 새침해졌다.


뜨끔해져,

공연히 골목의 이곳저곳을 카메라에 담는다.


언제부턴가

나는 풍경보다

사람을 찍게 되었다.


길을 걷는 누군가의 자세,

한순간 스치는 표정,

그 찰나를 담고 싶다.


늘 놓치다가

어쩌다 한 장 성공하면

그 기쁨은 배가 된다.


김광석 거리에서 음악을 듣고

시를 낭송하다가

조금 이른 점심을 먹으러 간다.


참깨 국수로 유명한 맛집.

점심시간이면 자리 잡기 힘들어

조금 서둘렀다.


엄마는 맛있는데,

딸은 젓가락만 휘적인다.


요즘 아이들의 입맛은

우리 세대와 다르다.

기름지고, 달콤한 것에 끌린다.

거리 음식 같은,

톡 쏘고 자극적인 것들.


그래, 존중하자고 마음먹는다.

그게 이해의 시작일 테니까.


점심을 마치고

모명재로 향하는 길.


길가에 만발한 배롱꽃이

붉고 환하다.

대구 곳곳이 꽃으로 물들었다.


모명재는

경산 객사를 헐고 나온 재목으로

지어진 제실이다.

중국에서 귀화한 두사충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지은 공간.


‘명나라를 그리워한다’는 뜻, 모명재.

배롱꽃을 유독 좋아했다던 그.

배롱꽃 역시

중국에서 건너온 꽃이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원군으로 조선을 찾은 두사충은

전쟁이 끝난 뒤

두 아들과 함께 이곳에 남는다.

풍수에 밝았고,

이순신 장군의 묘 자리도 그가 정해주었다.


닮은 이들은

서로를 알아본다 했던가.

두사충은

이국의 외로움을

배롱꽃으로 달랬을까.


모명재 앞,

그의 무덤을 지키듯 서 있는

두 그루 꽃나무.

고요하고 환하다.


꽃나무의 배웅을 받으며

다음 목적지, 대구미술관으로 향한다.


〈대구 여행기 5 — 행복한 평행선〉


대구미술관으로 가는 길,

대공원역에서 미술관까지 순환버스가 운행된다.

미술관 앞마당엔 토끼들이 서 있었다. 조금은 생뚱맞지만, 여름 하늘이 그 어색함을 덮는다.


안으로 들어서자 서늘한 공기가 먼저 닿는다.

밖에서는 숨이 턱 막히던 더위가 이곳에선 잠시 멈춘다.


1층 전시실에서 영상을 보고, 2층으로 올라갔다.

딸과 나란히 걷는다.

각자의 속도로,

각자의 감상으로.

손성완 작가의 작품 앞에서 우리는 오래 서 있었다.


처음엔 물고기 떼 같고,

다시 보면 보리밭 위를 스치는 바람 같고,

또다시 보면 하늘을 가르는 새들의 군무 같았다.


“엄마, 나 이 작가 좋아.”

“응. 나도.”


그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조금 아쉬웠다.

전시를 마치고 나오며 우리는 조금 더 가벼워졌다.


연일 최고 기온을 경신하던 더위도 우리 여행의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함께 걸었기에,

함께 나눴기에 이 순간은 이미 추억이 되었다.


우리는 결국

하나가 될 수 없는 두 개의 우주다.


서로 다른 궤도를 돌지만 더 멀어지지 않기로 한 사이. 수직이 아닌 수평의 거리.


닿지 않아도 평행을 유지하는 관계.

엄마와 딸은 인생이라는 긴 여행길에서 잠시 나란히 걷고 있을 뿐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행복한 평행선.

우리는 그렇게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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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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