솜털 덮인 백차를 마시며 떠오르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
솜털 덮인 차의 어린 싹을 따서 비비거나 덖지 않고 그대로 건조시켜서 만든 차를 '백차'라고 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차도 바로 이 백차인데, 동물도 아닌 이 찻잎이 온통 흰 털을 뒤집어 쓰고 있는 것도, 또 그 털을 쓰다듬었을 때의 느낌도 무척이나 귀엽다. 그래서 나는 이 백차를 우려마실 때 보통 귀여운 백아를 하나 옆에 꺼내두고 연신 귀엽다 귀엽다, 하며 쓰다듬으며 마시곤 한다.
얼마 전 집을 정리하다가 하얀 눈이 뒤덮인 독일의 노인슈반스타인 성(백조의 성, 디즈니 성의 모티브가 된 성)을 찍은 사진을 발견했다. 그 뒷장에는 '아무런 댓가도 바라지 않는 마음이란 쉽지 않음에도 그러해준 것에 대해 무척 고맙게 생각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찾아내고 볼 줄 아는 눈을 갖길'이라는 메시지가 적혀있었다. 이 사진 엽서는 고등학교 2학년 생일에 선생님이 써주신 엽서였는데, 사실 선생님이라고 했지만 언니, 아니 내 마음속에서는 친구 같던 분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도 오랜 꽤 오랜 시간을 연락하며 지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선생님은 사고로 우리 곁을 떠나가버리셨다.
함께했던 선생님의 30대, 그 30대를 내가 지나며 선생님의 나이가 되어보니 엽서에 적힌 말의 의미를 조금씩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선생님이 나를 예뻐하셨던 이유도, 그리고 얼마나 좋은 분이었는지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내가 이해한 것이 맞는지 물어볼 수 없다는 것은 너무 아쉽지만.
삶에서 종종 힘겨운 순간을 만나면, 선생님을 떠올리며 하소연 하기도, 조언을 구하기도 한다. 물리적으로 옆에서 함께하는 사람만큼 늘 큰 의지가 된다. 정말 고맙다 생각하면서도 아 그때의 선생님에게도 내가 많은 힘이 되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며 이런 인연이 있을까 싶다.
그래서 선생님을 생각하면 백차가 떠오른다, 아직 솜털 상태인 나를 그리고 아무런 가공 과정도 거치지 않은 나의 순수한 가치를 알아봐주고 늘 존중해주신 선생님. 솔직히 10대의 고민을 그땐 다 그렇지, 별것도 아닌데 하고 웃어 넘겨버릴 수도 있었을텐데 늘 진지하게 들어주고 고민해준 선생님께 '고맙다'라는 말을, 마음을 전하지 못해서 정말 아쉽다.
그래도 다행인건 선생님에 대한 기억을 공유할 소중한 친구가 있다는 것. 같은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고 심지어 지금까지 함께하는, 지금은 선생님이 된 내 친구와 특히 요즘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서로 그립다, 보고싶다, 고맙다 말하며 대답과 해답을 들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채워 나간다.
백차는 '1년이면 차로 마시고, 3년이면 약, 7년이면 보물이다'라는 말이 있다. 내 곁에 있는, 또 내 마음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과의 인연도 이와 같이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햇 백차의 폴폴 날리는 야생화 같은 신선한 향기가 3년이 지나고 7년이 지나며 악초와 한약재 같은 향기를 내는 것처럼 시간이 갈 수록 서로에게 약이 되고 보물이 되는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고 감사하며 살고 싶다.
그리고 딱 한번, 선생님과 마주하고 차를 마실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깨끗하고 둥근, 하얀 다관에 이 백차를 정성스레 우려 내어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