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슬픈 이야기는 싫다. 눈물도 많아지는 이때 (갱년기임) 슬픈 이야기는 왠지 내 마음을 추스를 수 없게 할 것만 같다. 그런데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그리고 여지없이 나는 펑펑 울고만 말았다.
보는 기력이 다해가는 죽음을 앞둔 노인이다. 부인은 3년 전에 치매로 요양원으로 보내고 식스텐이라는 반려견과 함께 지내고 있다. 하루 4번 요양보호사가 교대로 방문해서 식사와 샤워를 도와주고 있다. 한스라는 아들과 20대가 된 엘리노르라는 손녀가 있다.
보는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로 치유받지 못한 삶을 살았다. 때문에 아버지를 노인이라고 부르며 타인처럼 대한다. 아버지의 폭력과 무관심을 견뎌내지 못했고 끝내 화해하지도 못했다. 그러면서 보는 자신이 노인보다는 나은 아버지라 생각한다. 하지만 문득 자신과 한스의 관계에서 예전 노인과 자신의 모습이 보이는 거 같아 괴로워한다. 아들인 한스는 아버지가 좀 더 편안하게 지내시길 바라고, 보는 아들이 점점 자신의 영역을 침입하는 거 같아 불편해한다. 반려견을 산책시키는 일도 어려워진 아버지를 대신에 한스는 반려견 식스텐을 다른 집으로 보내고, 보는 아내를 요양원으로 보낼 때 보다 더 힘들어한다. 게다가 가족 같은 친구 투레마저 죽게 되자 보는 이제 본인의 마지막을 준비한다. 마지막 순간에 보는 아들에게 좋은 일들만 일어나기를 바라며 ’ 너도 알다시피 난 네가 자랑스럽단다.‘라고 말한다. 보가 떠나는 마지막 문장이다.
’ 주변이 너무나 어두워 나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식스텐의 털 냄새는 내 코끝에서 어른거렸고, 동시에 내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긴 거 같았다. 무언가가 방향을 바꾸는 듯한 느낌, 식스텐의 축축한 코가 내 손 안으로 들어왔고, 동시에 내게 기대어 오는 식스텐의 몸을 느낄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말할 수 없이 맑아졌다. 창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나는 남쪽으로 날아가기 위해 두루미들이 모여드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 작품은 노인이 죽기 전 6개월간의 노인 보 시점의 이야기이다. 보는 아버지에게 많은 상처를 받았지만 아들에게는 좋은 아버지가 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어느새 50대가 되어 버린 아들과의 대화를 힘들어하며 항상 마음과는 다른 말을 하는 자신을 책망한다.
나도 아들이 사춘기가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점점 대화가 힘들어진다. 나와의 대화는 그저 잔소리라고 치부하는 아들이 참 원망스럽기도 했다. 근데 가끔 보면 나도 내 마음과 다른 말들을 내뱉는다. 예를 들면 ’ 요즘 공부하기 힘들지? 고3이라 스트레스 많이 받지?‘ 하고 이런 말을 하고 싶은데 정작 내 입에서 나온 말은 ’ 모의고사 준비 잘하고 있는 거니? ‘이다. 그러면서 나도 어린 시절 우리 부모님과의 관계를 떠올려보았다. 나는 얌전하고 공부도 잘하는 평범한 학생이었는데 부모님이 내게 칭찬을 해 준 적이 별로 없었던 거 같다. 그에 비해 부정적인 말들은 많이 듣고 자란 거 같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으며 노인과의 관계에서 내가 더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문득 내 안에서 노인의 모습을 볼 때 힘들어하던 보의 마음을 정말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이지만 삶이 다해가는 시간에 이처럼 많은 것을 생각하고 여러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치매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아내를 보기 싫어하고, 아들과 사소한 일로 투닥거리고, 손녀와의 대화를 반기고, 친구와 전화 통화로 안부를 전하고 삶을 이야기하는 모습들이 죽음을 앞둔 노인의 모습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노인과 화해하고 아들에게 자랑스럽다는 말을 전하며 마지막을 맞이하는 보의 삶이 참 편안해 보였다.
무엇보다 아들에게 '네가 자랑스럽단다'라고 말하는 장면은, 정말 감동적인데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하는 말로는 사랑한다 라는 말 이상이지 않을까 싶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누군가에게 ’ 사랑한다 ‘ 는 말도 ’ 자랑스럽다 ‘라는 말을 하기가 힘들어지는 거 같다. 그렇다고 내 마음이 메마른 건 아닌데, 오히려 어느 때보다 더 말랑한데, 좀 더 표현하면서 살아야겠다.
인생의 또 하나의 깊은 울림을 준 ’ 보‘ 할아버지에게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