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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 노래자랑

by 재인

올해는 광진구가 개청 30주년이라고 한다. 4월에 구의역으로 광진구 신청사가 이사를 했고 5월에는 어린이 대공원에서 어린이날을 기념하여 어린이 정원 페스티벌과 야외 정원 도서관 등 다양한 체험형 어린이 프로그램이 있었고 6월에는 광진 가족 한마음 걷기 대회와 광진 가족 페스티벌이 열리고 KBS 전국 노래자랑이 광진구에 온다.

나는 이번 달에는 주민기자단 기사로 KBS 전국 노래자랑 광진구 편을 취재하기로 했다. 녹화 방송은 어린이 대공원 숲 속의 무대에서 2시에 열렸다. 나는 점심을 먹고 시간에 맞게 도착했다. 하지만 숲 속의 무대에 도착하지 못했다. 숲 속의 무대로 가는 길은 몇 군데 있는데 모두 경찰 하에 막혀 있었다. 이게 뭐지? 아직 입장이 안 되나? 사람들은 줄을 서지 않고 주의를 빙 둘러 서 있었다. 나는 숲 속의 무대 안쪽을 살짝 엿보았는데 얼핏 봐도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그때 나는 놀라서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했더니 벌써 숲 속의 무대는 만석이라 입장이 불가하다는 것이다. 아, 망했다. 내 기사 어쩌지?

가까운 곳이라 안일하게 생각하고 일찍 올 생각을 안 하고 너무 시간에 맞게 온 것이 문제였다. 혹시 모를 다른 입구를 찾아 헤매다가 그중 한 군데서 마침 잠깐 문을 열어 주신다고 했다. 천천히 질서를 지켜 입장하라고 하셨다. 하지만 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갑자기 앞다투어 앞으로 나아갔고 나는 뒤에서 미는 힘 때문에 그만 넘어질 뻔했다. 많은 사람들이 입장하면서 흥분했지만 다행히 큰일은 생기지 않았고 나는 어찌어찌해서 들어오게 되었다.


녹화는 이미 시작되었고 가수 김연자 님의 첫 무대로 관객들은 후끈 달아올랐다. 나는 일단 무대 쪽과 관객석의 사진을 차례대로 찍고 구경할 만한 장소를 물색했다. 물론 앉을자리는 없었고 (관객석은 8000석이었지만) 날씨는 오후 한낮이라 이미 더워서 그늘 쪽으로 간신히 서서 지켜볼 곳을 찾았다.

참가자들은 무대에 나와 자기 노래 실력을 뽐냈는데 모두들 하나같이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떨지도 않고 어쩌면 그렇게 노래를 잘하는지 참 신기했다. 그에 비해 나란 인간은 얼마나 샤이한지 처음 보는 사람과는 밥 먹는 것도 어렵고 사실 대화 하기도 힘들다. 나이가 드니 그래도 조금 나아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본성이 어디 가겠는가? 그런 나로서는 이런 무대에서 노래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데. 근데 그런 일을 내가 한 적이 있었다.


매년 독어 독문학과에서는 독일의 10월 뮌헨에서 열리는 옥토버 페스트(Oktober Fest)를 본떠서 우리 학교에서도 10월 옥토버 페스트를 열었다. 우리 과에서는 매년 중요한 행사였다. 축제이니 주점도 열고 댄스공연도 하는데 그중 제일 유명한 것이 독일어로 하는 원어 연극이었다. 대학 1학년 때 나는 독일어 연극을 했다. 그때는 무슨 용기가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친구 따라 하게 된 건지, 그때 막 독일어에 재미를 느낄 때라 하게 된 건지, 아무튼 나는 독일어 연극을 진짜 하게 되었고 비록 주인공은 아니었지만 조연으로 꽤 비중이 있는 간호사 역할로 참여했다. 처음 해보는 연극을 그것도 독일어 원어로 하게 되어 얼마나 연습을 했는지 모른다. 자다 깨서도 독일어로 흥얼거렸을 정도이니. 연극을 처음 무대에서 선보이던 날 같은 과 동기들이 항상 샤이하기만 한 나를 보고 얼마나 놀라던지, 연극 제목은 생각이 나지 않지만 그 벙찐 얼굴들은 왠지 기억이 나는 듯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원래부터 샤이한 것이 아니라 자신감이 부족하고 용기가 없어서 그랬던 거 같다. 그때 무대에 서본 경험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되었고 남은 대학 생활을 하는 내내 좋은 동기부여가 되기도 했다.


과거의 나를 떠올리다 보니 정말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겠다. 그때 나는 정말 하고 싶은 게 많은 꿈 많은 여대생이었는데. 독일어 연극을 시작으로 통기타 음악 동아리에서 기타를 배우면서 연습한다고 동아리 방에서 동기들과 밤을 지새우기도 하고, 해럴드 영어 동아리에서 매주 영자 신문 기사를 찾아 해석하고 돌아가면서 발표를 하기도 하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그때의 나와 다르지 않구나 생각되면서, 마치 과거의 나와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멀리멀리 돌아 다시 나에게 돌아온 느낌이랄까?

오늘 이 무대에서 아낌없이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 사람들도 이 일을 계기로 자신감을 얻고 앞으로 살면서 가끔 꺼내어 볼 수 있는 좋은 경험이 되리라고 생각된다.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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