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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시작

by 재인

여름이 시작되는 6월, 나는 우연히 여름이란 제목이 들어가는 세 권의 책을 읽게 되었다. 그중 처음 본 책은 성해나 작가의 “두고 온 여름”이다. 이 책은 한때 가족이기도 했던 형제 기하와 재하의 시선을 번갈아 보여주고 있는데, 나는 같은 일을 두고 서로 다른 시선으로 보여주는 이런 이야기를 좋아한다.


처음 책을 읽으면서는 열아홉 살, 어쩌면 거의 다 커버린 나이이지만 아직 성인은 아닌 사춘기 반항기가 남아 있는 기하에게 마음이 갔다. 아버지와 재혼한 새어머니와 그녀가 데리고 온 열한 살의 동생 재하는 좋은 사람이지만 기하는 그들에게 선뜻 마음을 열지 못한다. 아버지와 엄청 돈독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사랑이 새어머니와 동생 재하에게 가는 것을 기하는 못마땅해하고 질투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과 가족이 되기를 온몸으로 거부한다. 나는 기하의 아버지가 기하를 더 따뜻한 마음으로 품어 주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하가 새어머니와 동생에게 마음을 주지 못한 것은 그들이 미워서가 아니라 어쩌면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젊은 나이에 아내를 잃고 어린 아들을 홀로 키웠던 아버지의 외로운 마음도 느껴진다. 자신의 아들은 엄마가 없었지만 부족함 없이 컸는데, 반면에 너무나 어려운 환경에서 살고 있었던 그녀와 그녀의 아들이 참 애틋했을 거 같다. 거의 다 커버린 아들이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왜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편 기하의 아버지와 재혼한 새어머니는 어땠을까?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친척집에 더부살이를 하다 만난 첫 번째 남편은 직업도 없이 도박에 폭력에 교도소를 들락거려 결국 이혼을 한다. 그를 피해 도망쳐 살아가다가 자신과 자신의 아들까지 따뜻하게 보듬어 준 기하 아버지를 만나 재혼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 까칠한 그의 아들과 전남편의 집요한 협박으로 인해 계속 마음 졸이며 산다.

새어머니의 아들 재하는 어릴 적부터 심한 아토피를 앓고 폭력적인 친부한테 괴물이라 불리며 상처를 받고 어린 나이에 어리광 한번 부려보지 못하고 자랐다. 마음 주지 않는 형 곁에서 맴돌고 항상 가슴 졸이며 사는 엄마를 불쌍하게 여기고 평생 받아 보지 못한 사랑을 주는 새아버지에게 고마움을 느끼지만 어쩐지 부채감 또한 느낀다.


이들은 가족이 되었지만 같이 한 사 년의 시간 동안 서로 다른 마음을 품고 살았고 그래서 누구도 행복하지 못했던 거 같다. 그들은 결국 헤어지고 시간이 흘러 재하와 만난 기하는 그때 미안했다는 말을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하고 재하와 헤어지고 오면서 마치 두고 온 게 없는데 두고 온 것이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낀다. 기하가 두고 온 것은 그해 여름이었을까?

두 번째 책은 김애란 작가의 “바깥은 여름”이다. 이 책은 7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상실과 아픔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가지면서 마치 하나의 소설처럼 느껴진다. 그중 “풍경의 쓸모”가 가장 마음에 남아 있다.

대학 강사로 일하는 정우는 어릴 적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나서 떠나고 아버지와의 함께 한 시간보다는 아버지가 생일이나 졸업식 때 보내온 선물로 그를 기억한다. 어느 날 회식이 끝나고 술에 취한 자신을 곽 교수가 태워다 주겠다고 해서 가다가 사고가 난다. 차에 여자아이가 치었지만 다행히 괜찮았고 그때 곽 교수는 본인이 승진시험을 앞두고 있으니 차를 정우가 운전한 것으로 해달라고 부탁한다. 시간이 흘러 정우가 교수 임용직을 앞두고 있고 정우는 곽 교수를 찾아가 인사한다. 한편 오 년 만에 아버지가 그 사람이 아프다며 돈을 빌려달라고 찾아온다. 어머니의 환갑 기념으로 가족 여행을 간 정우는 이런 여러 가지 일로 마음이 불편한데 돌아오는 길에 교수임용에서 떨어졌고 가장 반대를 한 사람이 곽 교수였다는 얘기를 전해 듣는다. 그리고 아버지의 그 사람 부고장을 받는다. 정우는 “나는 공짜를 바란 적이 없다.”라고 중얼거린다. 곽 교수를 대신해 음주 운전으로 벌점을 받고 이후 정교수로 임명되리라 기대했던 자신에게, 아버지가 자신을 버렸음을 원망하고 끝내 돈을 빌려주지 않아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한 자신에게 하는 말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항상 인생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한다. 누구의 들러리나 누구의 병풍이 되길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인생에서 언제나 주인공일 수도 없고 누구의 들러리나 병풍이 되지도 않는다. 누구에게나 한 번의 기회는 있는 법이고 그 기회를 알아차리고 차지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일 뿐이지.

그렇다면 나는 지금 내 인생에서 주인공인가? 아니면 풍경인가?

세 번째로 본 책은 김금희 작가의 “첫여름, 완주”란 책이다. 책을 처음 받아 보았을 때 대본집 아닌가 하는 생각에 나는 내가 책을 잘못 주문할 줄 알았다. 하지만 이 책이 오디오북으로 제작된 책이란 걸 알게 되었다. 또한 배우이기도 한 무제 출판사 박정민 대표가 시각 장애인인 아버지에게 바치는 책이란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정말 의미 있는 책이라 생각되었다.


“첫여름, 완주”는 마치 한 성인 여성의 성장기 소설 같다. 성우인데 목소리에 문제가 생겨 우울증에 빠지고 믿었던 선배 언니에게도 배신을 당하고 갈 곳 없는 열매는 선배 언니 고향인 완주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암투병 중이면서 매점과 장례사 일을 하며 사는 언니의 엄마,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히어로처럼 나타나 열매를 구해 주는 신비로운 인물 어저귀, 까칠하지만 마음이 따뜻한 옆집 소녀 양미와 혐오와 폭력을 겪고 완주까지 오게 된 다문화 가정 친구들, 샤넬이라는 개와 살고 있는 외로운 여배우, 입이 무겁다면서 마을의 모든 비밀을 말해주는 동네 이장 아저씨까지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여름을 보내면서 열매는 점차 마음의 병을 치유한다. 그리고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살아갈 힘을 얻는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오디오로도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디오로 들으면 책을 읽을 때 느낄 수 없었던 다양한 여름의 소리를 들으며 또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거 같다. 어저귀와의 짧은 사랑이 너무 아쉬워서 마지막에 버스에서 열매를 깨운 것이 어저귀라고 믿고 싶어진다. 열매가 여름을 잘 완주하고 성장한 것처럼 나도 이 무더운 여름을 잘 완주하고 싶다.

비숫해 보이지만 각기 다른 여름에 관한 세 권의 책을 읽으면서 여름을 시작했다. 누구에게는 여름이 아쉬움으로, 누구에게는 여름이 진한 상실의 아픔으로 또 누구에게는 잘 이겨낸 여름의 진정성으로 다가왔다.

올여름은 무지 덥다고 한다. 몇 년 전부터 여름은 계속 길어지고 있고 해마다 역대급 무더위라는 말을 갈아 치우고 있다.


나에게는 여러 가지 일들을 처음 해 보는 올해가 특별한 한 해이기도 하다. 그래서 봄에 씨앗을 뿌리듯 새로운 일들을 잘 시작한 것처럼 여름에는 하는 일들이 뿌리가 깊게 내려 무럭무럭 잘 자라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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