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한강 작가의 아홉 번째 책이다. ‘그대의 차가운 손’ 이란 책만 읽으면 시집을 포함한 그녀의 단편, 장편 소설을 모두 읽게 된다. 그래서인지 올 겨울은 한강 작가와 함께 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좋아하는 작가를 발견한 후에 그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 읽는 것은 나의 오랜 루틴이다. 그렇게 해서 몇 권 읽다 보면 뭔가 진부한 느낌이 들어 다시 다른 작가를 찾곤 했다. 하지만 한강 작가의 책은 읽을수록 더 좋아지는 느낌이다. 마음에 드는 문장들이 많아 계속 곱씹으며 읽게 된다. 그래서 그녀의 마지막 책만 남은 지금 무척 아쉬운 마음이다.
그녀의 책은 초반에 몰입하기가 조금 어려웠다. 아직 내용은 모른 채 읽는 문장들이 하나같이 시적인 느낌이라 빨리 읽어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이 ‘바람이 분다,가라’의 책도 여느 책과 마찬가지로 마음을 움직이는 문장들이 참 많았다. 가령 초반에 주인공 정희가 새벽에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깼을 때 나오는 문장이다.
‘잠시의 시차를 두고 전화벨이 끊기자 여러 조각으로 깨어졌던 정적이 서서히 서로의 몸을 핥으며 물처럼 하나가 된다.’
이 작품은 주인공 정희가 절친인 인주의 죽음에 의문을 가지고 그녀가 자살하지 않았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그녀가 죽기 전 1~2년 동안의 행적을 따라가는 내용이다. 약간의 미스터리 성격이라 개인적으로는 더 재미있게 느껴졌다. 글 곳곳에 나오는 우주 천체의 관한 글도 좋았다.
‘모든 별은 태어나서 존재하다가 죽는다. 그것이 별의 생리이자 운명이다. 인간의 몸을 이루는 모든 물질은 별로부터 왔다. 별들과 같은 생리와 운명을 배고 태어난 인간은 별들과 마찬가지로 존재하다가 죽는다. 다른 것은 생애의 길이뿐이다.’
어린 시절부터 단짝 친구였던 인주와 정희, 인주에게는 삼촌이 유일한 가족인데 그녀는 어린 시절 엄마의 알콜 중독, 자살 등 때문에 마음속에 깊은 트라우마가 있다. 지병이 있던 유일한 삼촌마저 병으로 죽자 그녀는 깊은 상실감에 빠진다.
정희는 가부장적인 아빠와 오빠들, 언제나 자신의 희생만을 강요하는 엄마로 인해 깊은 피로감을 느낀다. 세 번의 유산과 이혼으로 지친 그녀는 어느 날 인주의 사고 소식을 듣게 되고 인주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리고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라고 생각하고 그녀의 행적을 뒤쫓게 된다. 그러면서 정희가 알지 못하는 인주의 얘기들을 알게 되고 누구보다 본인이 인주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실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나는 너를 몰랐다. 네가 나를 몰랐던 것보다 더
하지만 어쩌면 너는 나를 모른다고 느낄 때가 있었을까
내가 너를 몰랐던 것보다 더’
정희와 인주 삼촌은 좋아하는 사이였다. 하지만 세속적인 연인 관계는 아니다.
36세 삼촌과 18세 정희는 스승과 제자이며 서로의 선을 넘지 못하는 너무나 순수한 관계였다. 인주 삼촌이 죽었을 때 인주는 이 사실을 정희에게 알리지 않고 조용히 혼자 장례를 치른다. 왜 그랬을까? 19세 여고생이였던 인주도 혼자서 감당하기 힘든 일이 였을 텐데. 첫 번째로 드는 의문이다.
정희는 인주의 행적을 쫓다가 인주 엄마의 비극적인 과거에 대해 알게 된다. 그리고 인주가 왜 과거의 비극적인 일이 생기게 된 미시령 고개를 갔는지 이해하게 된다. 인주는 엄마의 과거에 대해 알고 그녀가 왜 알콜 중독으로 살 수 밖에 없었는지 이해하게 되었을까. 두 번째 의문이다.
정희는 마침내 인주의 마지막 행적을 알게 되고 인주와 연인 관계였다고 주장하는 강석원이 인주를 죽게 한 거라고 생각한다. 강석원은 인주를 사랑을 넘어 집착하고 소유하려 들고 그녀의 마음을 의심하게 된다. 그 의심하는 마음 때문에 몰래 그녀를 미행하게 되고 그녀의 사고를 목격한다. 그녀는 단순한 사고였을까. 인주의 말대로 강석원이 뒤에서 차를 박은 것일까. 인주는 강석원의 말대로 정희를 사랑했을까.
인주가 정희에게 마지막에 하려던 말은 무엇이였을까.
‘삼촌
수유리 집에서 새우던 밤들을 기억해.
깜깜한 거리를 해매다 돌아온 새벽.
수도꼭지를 틀어 찬물을 마시고, 얼어붙은 얼굴을 씻고.
건너편 동네에 불빛들이 밝혀지는 걸 지켜봤어.
정희네 부엌에도 불이 켜졌을까. 생각하면서.
무한히 번진 벅 같은 어둠 속에 우리가 살고 있다고 삼촌은 말했지.
생명이란 가냘픈 틈으로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지만.
언젠가 우리한테서 생명이 꺼지면 틈이 닫히고.
흔적 없이 어둠 속으로 스며들게 될 거라고.
그러니까, 생명이 우리한테 있었던 게 예외적인 일, 드문 기적이었던거지.
하지만 알 것 같아.
내가 어리석어서가 아니었다는 걸.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는 걸.
지금 내가, 그 얼음 덮인 산을 피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한강 작가의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슬프고 안타깝고 가슴 아프다.
인주도, 정희도, 인주 삼촌, 인주를 사랑했다는 이유로 집착하는 강석원까지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가는 걸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이 작품 또한 나에게 무수히 많은 질문들을 던진 채 오랜 시간 내 기억에 머무를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