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겁이 많아서 공포영화는 보지 못한다. “쏘우”시리즈처럼 잔인함을 공포스릴로 표현하는 영화나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동주”에서처럼 일본군이 동주를 고문하는 장면 등은 절대로 못 본다. 왜 그런지 이런 장면을 우연히라도 보게 되면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꽤 오래 남아 문득문득 떠올라 소름이 돋곤 한다.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한강의 작품 “소년이 온다”는 혹여나 두려운 장면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 그래서 계속 읽기를 미루고 있었다. 하지만 올해 45주년을 맞은 광주 민주화 운동을 이제는 더 이상 피하지 않고 마주하고 싶었다. 그리 길지 않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몇 번이나 읽기를 멈추고 마음을 추슬러야 했다. 그리고 책을 덮은 후에는 한동안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동호는 겨우 중학교 3학년, 열일곱 살이다. 동호와 같은 학교 친구이자 동호네 집에 세 들어 살고 있는 정대는 호기심과 분위기에 이끌려 동호와 같이 민주화 행렬에 참가한다. 그러다 계엄군의 총에 맞고 죽는다. 동호는 놀라고 두려워 정대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도망을 가고 이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 동호는 정대를 찾으러 상무관에 갔다가 누나들의 일을 돕게 되고 그날 아침 계엄군의 총에 맞아 죽는다.
은수는 5.18 때 상무대에 있다가 잡혀가고 하지만 운 좋게 혼자 살아남는다. 출판사에서 일하다 출판하는 책 때문에 경찰서에 끌려가고 뺨을 7대나 맞는다.
계엄군에 대항하다 잡혀간 진수는 모진 고문을 당하고 그의 눈이 텅 빈 눈빛이 되었을 때 풀려나왔으나 그는 살아남았다는 자책감에 짓눌러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선주는 여공 시절 노동권을 위해 평화시위를 한 적이 있는데 이때 경찰에게 폭행당해 장파열이 오고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취업이 안 되어 쉬고 있다가 우연히 5.18에 참여한다. 마지막까지 상무대를 지키다 잡힌다. 하혈이 멈추지 않을 때까지 고문을 당한 선주는 임신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남자와의 스킨십도 두려워하는 상태가 되었다.
인간이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잔인함은 어디까지일까? 그 잔인함을 어디에서 오는 것이며 또 인간은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걸까?
나치 전범인 독일 아돌프 아이히만의 이스라엘 사법부에 의해 받은 재판을 기록한 책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에게서 서로 긴밀히 연결된 세 가지의 무능함이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말하기의 무능함, 생각의 무능함, 그리고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함이다. 여기서 세 번째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함이란 판단의 무능함이고 판단 능력이란 옳고 그름을 가리는 능력을 의미한다. 판단이란 사유와 의지와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다.
그 당시의 군인들에게는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함이 있었던 게 아닐까? 아무리 계급체계라고 하지만 상부의 명령만 따르면 본인들에게는 죄가 없다고 생각했던 걸까?
고대 농경사회에서는 사망 원인의 15%가 인간의 폭력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인간은 본래가 잔인하고 폭력적이었을까?
한강 작가는 그녀의 작품에서 다양한 형태의 폭력을 보여주고 있다. “채식주의자”에서 영혜는 육식을 거부함으로써 가부장적인 가족과 사회적 억압에서 벗어나려고 했고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인선의 어머니 정심은 제주 4.3 사건의 피해자 오빠를 찾다 생을 마친다.
그녀가 이처럼 가슴 아픈 폭력을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그 폭력과 마주하는 것이 결국 사랑으로 가는 시작이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