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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제

by 재인

내가 절에 도착한 것은 10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절에서 기도는 보통 10시에 시작하는데 나는 날라리 신자라 항상 늦는다. 늦장 부리다가 늦을 때도 있고 기도 시간을 다 채우지 못할까 봐 부러 늦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늦지 않으려고 했는데 또 늦고 말았다. 내가 다니는 절에서는 올해 윤달을 맞이하여 영산대제를 하는데 49일 동안 살아있는 사람, 영가분들 위한 기도를 하고 오늘 회향이라고 천도해 드리는 날이다. 올해는 우리 아들이 고3인 데다 또 삼재라고 해서 유독 절에 열심히 다니고 있다. 올초에 방생기도를 다녀오고 매달 초하루 날이면 절에 들러 초를 켜 놓고 오고 부처님 오신 날은 하루에 세 군데 절에 가면 좋다는 얘기에 그날은 세 군데 절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리고 영산제 기도를 들어가서 오늘이 마지막 날이다.

절에 도착해서 마당에 들어선 순간 난 깜짝 놀랐다. 오늘이 마치 “부처님 오신 날”처럼 법당 앞마당에는 커다란 천막 아랫사람들이 가득했다. 법당문은 모두 활짝 열려 있었고 문마다 위에서 아래로 알 수 없는 주문을 적은 부적들이 가득 걸려있고 북과 태평소 소리 그리고 스님의 불경 소리가 한데 어우러저 마치 내가 어디에 와 있는 건지 순간 착각하게 했다. 나는 영산제 회향이 이렇게 큰 행사인지 몰랐다. 이 절에 계신 스님뿐 아니라 다른 절에서 오신 스님분들까지 해서 거의 10명 남짓 스님들이 행사를 하시고 계셨다. 자리를 맡아둔 동생 덕에 덥지만 편하게 앉아 기도문도 따라 읽고 하다 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그사이 스님들의 바라춤을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 한참을 넋 놓고 보고 있는데 불현듯 중학교 때인지 고등학교 때인지 국어 시간에 배웠던 조지훈의 시 “승무” 한 구절이 생각이 났다.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그때 선생님은 이 시에 대해 설명하시면서 이 시가 너무 아름답지 않냐며 승무를 추는 승녀의 모습이 나비가 날아가는 모습 같다고 하셨다. 언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씀하시던 그 장면만은 왠지 확실하게 떠오른다. 나는 이 시가 이상한 시라고 생각했던 거 같다. 그러면서 어느 부분이 아름답다고 하시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긴 그 나이에 아름답다는 것을 이해했다면 그것도 이상했을 것 같기도 하다. 지금 보는 스님의 바라춤은 “승무”라는 시를 떠올리게 하면서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그때 국어 선생님의 말씀처럼 한 마리의 나비 같다는 표현은 정말 시적인 표현이었는데 우리가 참 못 알아들었구나 싶었다.

12시가 넘어가자 태양은 점점 더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고 비록 천막 안에 있었지만 34도까지 올라간 햇살은 천막을 뚫고 내리쬐고 있었다. 갑자기 이 덥다 못해 불같이 뜨거운 날씨에 여기 모인 이 많은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여기에 모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위해 여기에 왔을까? 아니면 남편을 위해? 자식을 위해? 부모를 위해? 나 또한도 그렇고 많은 사람들이 나보다는 남편과 자식 그리고 부모의 기도를 위해 왔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근데 큰 스님이 말씀하셨다. 우선 내 기도를 하라고. 나를 위한 기도를 해서 내가 행복해지고 나를 충만하게 하라고, 그래야 내가 남을 돌볼 수 있고, 내 좋은 에너지를 다른 이들에게 나눠줄 수 있다고 하셨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아. 나는 오늘 이 말을 들으러 여기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말을 전에 몰랐던 것도 아니고 하물며 처음 들은 것도 아닌데 오늘은 뭔가 내 안에 깊은 울림이 있는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이 더위에 우리 아들이 아닌 나를 위해서 여기 왔구나 하면서. 절에서 내려오는 길은 여전히 뜨거웠지만 스님이 챙겨주신 떡과 좋은 말씀들과 내 기도 덕인지 시원한 기분으로 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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