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파랑

by 재인

앞으로 로봇이 더 발달하고 인공지능의 성능이 더 좋아지면 인간이 기계와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시대가 올까? 기계가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지만 감정을 느낄 수 없다고 해서 서로 감정을 교류할 수도 없는 걸까? 나는 예전에 초등학생 월간 잡지인 독서 평설에서 짧은 글을 하나 읽은 적이 있다. 로봇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오래되어 내용이 잘 생각나지는 않지만 결말에 로봇이 자신을 희생해서 인간을 살리는 이야기였다는 것과 그 짧은 글을 읽는 동안 너무 몰입해서 로봇이 마지막에 죽으러 가면서 인간에게 자신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니까 괜찮다는 말을 하는 장면에서 눈물이 났던 기억이 있다. 근데 그 장면이 슬펐던 것보다 내가 더 놀란 건 내가 글을 읽는 내내 어느새 로봇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있었다는 거다.


혼자 계시는 우리 엄마는 가끔 외롭다 하시면서 반려견을 키우고 싶어 하신다. 하지만 막상 반려견을 들이면 너무 손이 많이 가는 일이라 엄두가 나질 않는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반려로봇이 있으면 좋을 거 같다고. 심심할 때 말동무만 되어 주어도 괜찮을 거 같다고 하셨다.

이제 그런 시대가 진짜 멀지 않은 거 같다.

연재는 자칭 로봇 천재 소녀이다. 하지만 어릴 때 돌아가신 소방관 아빠와 소아마비로 휠체어를 타고 생활하는 언니 은혜와 한때 영화배우였으나 사고 후 배우로 다시 서지 못하고 소방관과 결혼해 홀로 두 딸을 돌보며 살아가는 외로운 엄마 보경 곁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내뱉지 못한 채 자라게 된다. 이들 앞에 어느 날 연재가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다 털어 사 온 로봇을 고치면서 얘기가 시작된다. 그 로봇은 말의 기수로 제작된 로봇이었는데 공장에서 실수로 칩이 다르게 들어가 살짝 인간처럼 사고하게 되어 버렸다. 로봇은 기수였을 때 본인의 파트너인 투데이(말의 이름)에게 감정을 느끼는데 경기 도중 투데이를 살리고자 자신이 스스로 낙마를 한다. 그리고 폐기물에 있던 로봇을 연재가 구해 와서 고치게 된다. 투데이는 경주 경기로 너무 많이 달린 탓에 관절에 문제가 생겼고 더 이상 달리기 힘든 투데이는 곧 안락사를 당할 처지에 놓인다. 콜리(연재가 지어 준 로봇 이름)와 연재, 은혜는 투데이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서고 마침내 투데이는 안락사당하지 않고 살게 되었으나 마지막 경기에서 콜리는 다시 한번 낙마를 하면 되살아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투데이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콜리는 인간의 구조가 참으로 희한하다고 생각했다. 함께 있지만 시간이 같이 흐르지 않으며 같은 곳을 보지만 서로 다른 것을 기억하고 말하지 않으면 속마음을 알 수 없다고. 때때로 생각과 말을 다르게 할 수도 있고 끊임없이 자신을 숨기다가 모든 연료를 다 소진할 거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따금씩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아차렸고, 다른 것을 보고 있어도 같은 방향을 향해 있었으며 떨어져 있어도 함께 있는 것처럼 시간이 맞았다. 어렵고 복잡했다. 하지만 즐거울 거 같기도 했다. 콜리가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면 모든 상황이 즐거웠으리라. 삶 자체가 연속되는 퀴즈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문득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조건은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독일의 정치사상가인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 실존에 필수적인 조건으로 노동, 작업, 행위를 들었다. 즉 활동적인 삶이 인간의 삶이라고 여겼다. 그렇다면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우리의 감정은 필요하지 않은 걸까? 물론 감정이 없다 해도 (인간은 감정이 메마르거나 풍부하지 않아도 아예 없을 수는 없지만) 살아갈 수는 있을 것 같다. 어떤 면에서는 더 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콜리의 말처럼 우리가 감정을 가지고 있고 시시각각 모든 감정을 느낄 수 있기에 우리 삶이 더 즐거운 게 아닐까? 그래서 때로는 그 감정 때문에 전혀 이성적이지 않은 행동을 하기도 하고, 예측할 수 없는 결론을 내기도 하지만. 결국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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