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클레어 키건의 4번째 작품이다. 앞서 “맡겨진 소녀”, “푸른 들판을 걷다.”, 그리고 “이처럼 사소한 것들”까지 그녀의 작품들은 모두 좋았고 그래서 그녀의 작품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에 이번에는 또 어떤 글일까 너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이번 작품은 그녀의 첫 작품이었던 “남극”을 비롯해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과 “너무 늦은 시간” 등 총 3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선 “남극”은 첫 문장이 마치 나의 마음을 들여다본 거 같은 기분이 들어서 제일 흥미롭게 보았다. 그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던 여자는 집을 떠날 때마다 다른 남자와 자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다.”
나는 남편이 나의 첫사랑은 아니지만 내가 여자로서 남편이 첫 남자이기 때문에 나이가 들면서 다른 남자와의 잠자리는 어떨까 하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물론 내가 남편과의 잠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냥 호기심이라고 해두자. 다시 남극으로 돌아가서, 주인공 여자는 마침내 주말에 그 답을 알아내기로 하고 집을 나선다. 짧은 자주색 원피스에 하이힐을 신고 진한 립스틱을 바르고 마음에 끌리는 술집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녀 앞에 나타난 한 남자와 술을 마시고 그의 집으로 간다. 그는 그녀에게 아주 친절했고 마치 아기를 다루듯 그녀를 소중히 여긴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남자였다. 그와의 잠자리는 당연히 좋았고 그녀는 이 일탈을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기로 한다. 하지만 그 남자는 그녀를 집에 가지 못하게 침대에 묶어두고 사랑한다고, 이해해 달라고 하고는 일을 하러 간다. 혼자 남겨진 그녀는 극도의 공포감과 절망감을 느끼며 남극과 죽은 탐험가들의 시체와 지옥, 그리고 영원을 생각한다.
솔직히 결말이 너무 놀라웠고 로맨스에서 갑자기 스릴러가 된 장면이 더욱 섬찟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생각대로 그냥 하룻밤의 일탈이었으면 좋았을걸. 역시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는 걸까?
주위를 바라보는 듯한 자세한 설명과 주인공의 섬세한 심리묘사 덕에 글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 영화처럼 장면들이 떠올랐고 다 읽고 난 후에는 마치 짧은 단막극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너무 늦은 시간”은 카힐이라는 한 남자의 하루를 그린 작품인데 그날은 바로 그가 결혼하기로 한 날이었다. 그는 한 회의에서 사빈이라는 여자를 만나고 곧 둘은 데이트를 하게 된다. 그러다 그는 그녀에게 청혼을 하고 둘은 결혼하기로 한다. 그는 사빈이 요리를 잘해서 좋았고 체구가 작고 갈색 머리에 몸매가 좋았고 처음 본 날 옷차림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그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좋았으므로 청혼을 했지만 막상 그녀와 같이 살기로 하고 그녀의 짐들이 그의 집에 들어오자 불편해하고, 결혼반지 크기를 조절하는 데에 추가금액이 발생하자 화를 내며 여성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이에 사빈은 갈등하고 끝내는 결혼하지 않기로 한다.
나는 이 글을 보면서 아직까지도 많은 남성들이 여성을 비하하고 혐오하고 남성 우월주의를 내세운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카힐은 여성에 대한 인식이 자라면서 아버지가 엄마에게 하는 것을 보고 배웠고, 따라서 여성비하에 대한 그 뿌리가 참으로 깊은 거 같았다. 카힐은 어릴 적 저녁식사 때 남동생이 어머니 의자를 빼버리는 바람에 어머니가 넘어지고 그때 아버지와 두 형제가 웃었던 일화를 생각하며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행동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지만 본인도 어느새 아버지와 같은 행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 본인의 태도나 행동에 반성하기보다는 욕설을 한다.
키건은 이 글에서도 간결하고 명확한 문체로 여성비하라는 문제제기를 하고 뿌리 깊은 남성 우월주의를 보여준다. 이처럼 짧은 글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하고 다양한 면을 느끼게 하고 말하지 않은 것조차 알게 한다는 점은 참으로 놀랍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우리가 그녀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